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3. 4. 9.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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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을 읽더라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나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부분을 누군가는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는가 하면,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래서 더 재미있는 거겠지. 하지만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재미와 놀라움보다, 비슷한 생각에서 오는 동질감이랄까, 공감의 연대가 때론 그립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이 헛헛한 기분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처음 깨달았다.(202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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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떠날 때가 온 것 같아. 너무 오래 있었어."

"그만큼 정이 많이 들었을 텐데."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정을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만 강해져.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란 심플하면 할수록 좋은 것 같아. 정이란 건 거추장스러울 뿐이지. 특히 직장에선."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내가 동료들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야. 그들은 친절하고 최소한의 예의가 무엇인지 알지. 하지만, 거기까지. 나는 단순 명료한 관계를 원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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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몸의 어딘가 힘을 주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정신은 그렇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는데) 몸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까.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내 몸의 상처들, 아픔들. 내가 내 몸에 가하는 형벌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몸에 힘을 빼자. 봄날의 나른함을 닮자.(20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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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 산불이 났었다. 멀리 있었지만 희미하게 타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그때만 해도 벚꽃이 제법 있었다. 다음 날 비가 왔다. 산불이 번질 때 비가 오면 좋았겠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잔불을 꺼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비였다. 지는 벚꽃이 이상하게 아쉽지 않았다.(20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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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얼마나 마셨냐고 아버지가 물었다. 술을 세면서 마셔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정말 어제 내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술이 많이 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술병을 세가면서 마시지는 않으니까. 주량을 알아야 적당히 마실 요량도 생기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건가?(20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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