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8월의 크리스마스'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시월의숲 2024. 1. 17. 23:09

 
한석규와 심은하 주연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정원(한석규 역)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비디오테이프 작동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그 장면에서 아들인 정원은 아버지에게 비디오테이프 작동법을 알려주려 하지만 나이 많은 아버지는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자꾸만 틀리게 말해서 정원이 버럭 화를 내고 만다. 어색해진 그 순간.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난감함도 아들의 화도 모두 이해가 되던 순간. 영화는 내내 잔잔했지만 그 이면에는 슬픔이 만져지던.
 
어쨌든 그 장면이,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차까지 마시고 난 뒤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떠올랐다. 찻집에서 아버지는 내게 은행 인증서가 만료되어 간다고 문자가 왔으니 갱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버지의 핸드폰에 깔린 은행 앱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눌러보았는데, 생각보다 쉬울 것 같았던 갱신 절차가 비밀번호 입력 화면에서부터 막히고 말았다. 내가 맨 처음 앱을 깔고 설정해 놓은 그 비밀번호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아버지에게 물었더니, 사위가 와서 뭔가를 설정했다는 말을 했다. 왜 그걸 진작에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나는 급작스럽게 화가 났다. 왜 화가 나는지 나조차 의아했지만, 어쨌든 나는 화가 났고, 짜증을 있는 대로 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화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버지를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나 자신을 향한?
 
그렇게 화가 났던 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나는 대체로 아버지와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지만, 유독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 행정적인 처리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아버지와 대화하는 중에 꼭 짜증을 내고야 마는 것이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 화는, 내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압도한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럴 때마다 난감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이렇게 주절대는 이유도 그 화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기 위함이다. 어떤 감정에 대해 쓰다 보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고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서. 
 
아,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내가 떠올린 장면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 영화 속 장면은 슬프도록 명징하게 이해가 되었지만, 내 경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