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6. 1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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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억이 안 날 줄이야. S가 부주의하게 놓아둔 물건을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몇 주가 지날 때까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그다음 날 '뭐 잊어버린 거 없어요?'라고 말하며 돌려주려 했는데! 오늘 S가 계속 그 물건을 찾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기억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건, S가 처음 그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내가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집에 있는 거 아니에요? 어디 있겠죠, 잘 찾아봐요!" 나는 점차 나를 믿을 수 없다.(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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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새로 구입했다. 모니터와 키보드도 함께 교체했는데, 이전에 오래 사용해서 뻑뻑해진 키보드를 쓰다가 새 키보드를 쓰니 이렇게 부드러울 줄이야. 글이 마치 저절로 써지는 것 같다. 기분 좋은 착각이다.(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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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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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좌우충돌한 하루였어!"라고 말했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좌충우돌 아니야?"라고 말하고는 서로 막 웃었다.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는지... 나 자신을 탓하고는 집에 와 혹시나 싶어 검색을 해보니, '좌우충돌'과 '좌충우돌'은 유의어였다. 그러니까 '좌우충돌'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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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것은 서로에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 끝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나'가 문제다. 우리는 누군가를 결코 변화(설득)시킬 수 없다. 왜 우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가.(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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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과일이 무척 먹고 싶다. 아무 과일이나. 하지만, 늘 그렇듯, 냉장고엔 먹고 싶은 건 없고 특별히 먹고 싶지 않은 것만 있다. 그렇다고 과일을 사러 나가기는 귀찮고. 뭐 어쩌자는 건지?(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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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인간인 것 같다. 모처럼 여러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안 해도 좋을 말을 하고 말았으니. 문득 떠오른 생각을 바로 내뱉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혼자 있는 것을 편안해하는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02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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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어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본다. 창밖에는 또 다른 아파트뿐이지만, 그 사이 푸른 나무들과 비에 젖은 도로 위로 우산을 쓴 사람들이 몇 지나다닌다. 갑자기 어디선가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아파트라는 걸 잠시 잊게 만든다.(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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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해보니, '어깃어깃'은 '어깆어깆'의 비표준어이고, '어깆어깆'의 뜻은 '큰 몸집으로 팔다리를 어색하게 움직이며 천천히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나온다. 참고어로 '어기적어기적' 있다는데... 나비의 날갯짓과 어깆어깆은 어울리지 않는 건가? 내가 생각한 것은 그게 아니었는데...(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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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얻은 건 쉽게 잃는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다.(202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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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 팬 돌아가는 소리. 여름의 열기, 아득한.(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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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랬다. 어쩌다 좋은 것을 가지게 되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 나중에를 연발하다 결국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고 상하거나 망가뜨리고 만다는 것을. 영원히 내 것은 없다. 아주 잠시 내 곁에 머물 뿐. 나는 무엇 때문에 자꾸만 모든 것들을 유예하고 있는 것일까?(202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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