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미지를 위한 루바토

시월의숲 2024. 6. 29. 16:39

어제가 지금까지 근무하던 곳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무려 세 번의 송별 모임을 했고, 새로운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와 잦은 술자리로 인해 나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업무를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다. 헌데 이상하지, 오래 있었던 곳을 떠나면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담담한 기분이 든다. 피곤함과 스트레스가 석별의 멜랑콜리한 감정보다 더 세다는 말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나조차 어떤 걸 느껴야 할지 잊어버린 걸까? 그냥 멍한 상태로 저번 주, 아니 이번 달이 흘러갔다. 그리하여 결국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은 도래했고, 7월이라는 미지의 - 지금까지는 익숙했지만, 앞으로는 아주 새로울 - 시간을 코 앞에 두고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와 격려, 칭찬과 조언의 말들을 들었다. 모든 말들이 다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축하와 칭찬, 격려의 말들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연신 아닙니다, 감사합니다,를 외쳐댔고, 습관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아래위로 흔들었다. 새로 옮겨가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의 조언은 내 정신을 바짝 차리게도 했다. 그는 선배로써, 인간관계의 노하우를 내게 전수해 주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들을 다 수긍하면서도, 내심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그'였기에 가능한 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말해주는 팁들은 사람들, 특히 상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언변의 기술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말들을 생각해 낼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했다. 나라면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할, 화려한 기술! 나를 어필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에 들게 만드는 그 대단한 능력을!
 
나는 요즘같이 스스로를 어필하지 못해 안달 난 시대에 겸손(이건 정말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그리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내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말들이다)의 말들은 오히려 자신감이 없고, 소심하며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나인걸.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계산된 어법이라는데 있었다. 말하자면 계획적인 어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했을 때 그가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줄 것인가에 대한 것 말이다. 나는 (당연하게도)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없고, 그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미리 생각하고 계산하고, 계획해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론 솔직함이 독이 될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솔직했으면 좋겠고,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말은 많이 할수록 스스로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말을 많이 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너무 삭막하려나?
 
어쨌든 7월부터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 앞에 서 있다. 내가 선 곳이 낭떠러지일 수도 있고, 나무로 가득한 숲길의 초입일지도 모르지만, 중요하고도 확실한 사실은 어쨌거나 나는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묵묵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이리저리 부딪치다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겠지.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
제목인 <미지를 위한 루바토>는 김선오 시인의 산문집 제목이다. 나는 그 책을 사놓고 아직 읽지 않고 있는데, 위 글을 써놓고 제목을 뭐로 할까 생각하며 문득 고개를 돌렸는데, 내 시선이 꽂히는 그 자리에 이 책이 있었다. '루바토'가 뭔가 싶어 책을 넘기자 이렇게 쓰여 있다. 
 
'악보에서 루바토는 시간을 훔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템포 루바토에서 연주자는 기존 템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다.'
 
어쩐지 보이지 않는 내 미래에 대한 바람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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