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돌이킬 수 없는 예감

시월의숲 2024. 7. 13. 00:00

열일곱 살의 나를 떠올린다.

 

더 멋진 반항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의 나는 학교를 조퇴하고 구립 도서관에 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서가를 돌아다니다 당시 유행하던 젊은 시인의 시집 한 권을 우연히 꺼내 든다. 수록된 첫 번째 시를 읽는다. 전율한다. 두 번째 시를 읽는다. 다시 전율한다. 도서관의 큰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 무언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 그 순간 나는 다른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전율의 기억을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가 펜을 들고 시인지 뭔지 그 비슷한 글을 쓰려고 시도해 볼 것이라는 예감, 언젠가 나의 시집 역시 이 도서관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으리라는 예감, 그러니까 ······ "여기가 내 세계구나" 하는 예감이었다.

 

- 김선오, 「미래로의 회귀」 중에서(『미지를 위한 루바토』 수록)

 

 

*

무언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러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알게 되었던 그 순간에 대해서 김선오 시인은, "여기가 내 세계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가 언젠가 시인이 되리라는 강렬한 예감에 휩싸였던 그 순간에 대해서.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처럼. 아니, 사실은 내게도 그런 예감의 순간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었지만.

 

그는 우리에게도 그러한 예감이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온다는 말은 끝내하지 않았다. 하긴 그도 알지 못하리라. 그것은 아마도 먼 훗날에야 겨우 알게 되는 종류의 감정일테니까. 그리고 그에게는 이미 그러한 예감이 현실이 되었으니까. 실현된 예감은 이제 예감이라고 부를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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