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게 인생 영화가 무어냐고 물었다.
나는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치 지금껏 단 하나의 영화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아직 인생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인생 영화란 말인가? 그는 내 이런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당신은 인생 영화가 있나요?" 내가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패왕별희>라고 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눈이 크게 떠졌다.
장국영이 나오는 그 영화 말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언젠가는 보리라 생각했지만 아직 보지 못한, 그리하여 기억에서 멀어져 버린 그 영화가 다시금 내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혹은 내가 그 영화 쪽으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음을 느꼈다. 무엇이 그가 그 영화를 인생 영화라고 칭할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순간, 나는 나 자신의 갑작스러운 흥분이 의아했다.
그러니까, 내가 <패왕별희>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보다, 그가 <패왕별희>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의외로 다가왔는지, 그 사실이 더 의아했던 것이다. 편견은 그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가 <패왕별희>를 봤다는 사실도, 그 영화를 인생 영화라 칭할 만큼 인상 깊게 봤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어떤 이의 인상만 가지고 어떤 종류의 영화를 좋아할 것이라는 내 편견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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