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오래된 묘지

시월의숲 2024. 9. 7. 23:28

왜 오래된 묘지일수록 높고 험한 산에 있는지 아니?

 

아버지가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버지는 말했다. 벌초를 하기 위해 산을 오르면서 세속의 모든 번뇌를 잊으라는 뜻이야. 정말 그런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벌초란,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지 못한 당신 부모에 대한 속죄처럼 보였다. 본인의 몸도 성치 않음에도 매번 벌초는 직접 하려고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쨌거나 번뇌는 잘 모르겠고, 예초기를 메고, 낫을 들고, 산을 오르니 확실히 잡생각은 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생각, 육체의 힘듦에만 집중하게 된다. 세속의 모든 번뇌를 잊으라는 말이 그런 뜻이라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일 년 만에 오른 조상들의 묘는 이제 땅과 하나가 되려 하고 있었다. 내 가슴팍까지 오는 풀들은 어떤 위협 혹은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풀들 때문에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마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처럼 산을 올랐다. 생각해 보면 그곳의 주인은 바로 나무와 풀들, 벌레들, 개구리와 뱀들,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아닌가. 우리는 그곳에서 침입자들일뿐. 예초기와 낫과 톱을 든 우리가 가시에 찔리고, 덩굴에 걸려 넘어지고, 벌에 쏘이고, 튀어 오르는 개구리에 놀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 테지. 풀들과의 사투 끝에 우리들은 결국 드러난 봉분을 보았고, 그 앞에서 절을 올렸고, 다시 산을 내려왔다. 올해의 숙제를 하나 끝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