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정류장에서

시월의숲 2024. 9. 18. 14:35

오랜만에 서울 출장을 다녀왔다. 서울은 내게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저 먼 곳의 상징적인 도시일 뿐. 언제 서울에 갔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갔었는지도. 그런 서울에 출장을 가야 한다고 들었을 때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내가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의아했다. 그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대도시(마치 외국을 방문하듯)에 가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불안감? 무엇으로 인한? 그래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오랜만에 본 서울은 여전히 모든 것들이 너무 많다. 사람도, 건물도, 소리도, 심지어 공허마저도. 과잉의 도시.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 터미널에 왔다. 버스를 기다리며 동서울버스터미널 2층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아직도 이곳은 오래된 정류장 특유의 분위기가 남아있다. 남루함이랄지, 지친 기색이랄지… 아, 그건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일까? 군인들은 갈 곳 잃은 표정으로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생각보다 많은 군인들로 역이 분주하다.
 
정류장에서,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다. 나는 서울에 오기 전 단 한 권의 책을 가져왔다. 『속삭임 우묵한 정원』. 반드시 그 책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오히려 반드시 그 책이어야만 했다는 강렬한 필연성을 느꼈다. 나는 그 소설을 아주 천천히 읽는다. '마치 동굴 속 돌의 울음처럼 내 안의 무엇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돌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우리에게는 결핍된 기나긴 영속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이곳, 정류장에서, 찰나의 인간들 사이에서, 읽는다.
 
나는 계속 읽는다. '나는 죽은 개의 머리나 바위가 거기 있듯이 거기 있으며, 이미 절반쯤 자연이다. 그러나 여전히 편지를 쓴다. 완성되지 않는 편지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오직 편지만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내게는 있다.'라고 그는 썼다. 오직 편지만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문장을 나는 읽고 또 읽는다.
 
그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 있으니, 문득 오래전에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생각났다. 이메일이나 메모가 아니라, 편지지에 펜으로 직접 쓴, 봉투에 우표가 붙어 있고, 그리하여 우체부가 집으로(혹은 집이 아닌 어딘가로) 가져다준 편지 말이다. 누가 보냈는지 받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고, 기다렸지만 오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데 오는. 나는 무슨 편지들을 그렇게 썼던가? 
 
'오직 편지로만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고 그는 썼다. 오래전 나에게도 그런 것들이 있었을까. 지금은 수신인이 누구인지,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 편지들이. 나는 잠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페 안의 사람들을 둘러본다. 그들은 저마다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핸드폰과 노트북, 그리고 속삭이는 대화들. 차가운 커피잔에 서린 물이 테이블 바닥을 적셔 추상적인 무늬를 만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커피는 반도 마시지 않았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정류장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도착지가 집이든 어디든 일단 가야 한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집? 집은 무엇인가? 어떤 곳인가? 부치지 못한 편지는 아마도 타지 못한 버스와 같지 않을까. 정류장에서 나는 어디론가 가거나 가지 않을 수 있지만 머물 수는 없다. 그렇게 나는 서울이라는 추상적인 도시를 떠난다. 마치 아주 짧은 꿈 속에서 표류하다 가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