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시월의숲 2025. 2. 1. 17:35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강연에서 누군가가 인간관계에 상처받지 않는 법이 있느냐는 물음에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말로 보인다. 영상으로 본 것은 아니고 한 장의 사진으로 보았다. 마치 인용하듯 잘라낸 한 장의 사진으로. 그 한 장의 사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법이 있는가에서부터, 완전히 고립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이며 그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가...

 

완전한 고립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은둔수사처럼 속세와의 인연을 끊지 않는 이상. 만약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번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관계와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상처. 고독이 어쩌면 그 답일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에 상처받지 않는 법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저도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것이 인간관계다. 다만 상처에 익숙해지는 법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상처임을 서로가 알아본다면.

 

물론 우리는 안다. 모른 채 주는 상처 외에도, 그것이 상처인 줄 알면서도 주거나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완전히 고립되어야만 하는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하여? 반복되는 의문과 여전히 풀리지 않는 대답. 배수아는 그의 책에서 '자발적 고립'에 대해서 썼다. 그는 그것을 찬미하기까지 한다. 물론 자발적 고립이 곧 완전한 고립일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나 역시 그럴 수만 있다면, 자발적 고립을 원하며, 그것을 찬미한다. 상처를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발적 고립은 그 자체로 어떤 희열을 동반하므로. 작가가 최소한의 인간관계만을 유지한 채 독일의 인적 드문 숲 속에서 지내며 책을 읽고 글을 쓰듯. 그럴 수만 있다면.

 

상처받지 않을수도 없고, 완전히 고립될 수도 없다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