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5. 3. 15.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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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잘 지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내뱉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아쉽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운. 이런 게 말의 힘일까. 기대는 없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기대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기대란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걸 말하는데, 나는 일과 관련해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202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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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을 둘러싸고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 내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 여러 인간 군상들의 발언과 행동을 보면 새삼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깊이(하지만 비관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의 존엄함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혐오스러움을 먼저 깨닫고 경악하게 되는 것이다.(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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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고 나서야 그것이 꿈인 줄 알고 안도했다. 꿈속에서 나는 거짓의 삶을 살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 삶은 어쩔 수 없이 속여야 하는 삶이 아니라, 기존의 내 삶이 지겨워서 스스로 거짓을 꾸며낸 삶이었다. 꿈이 현실의 반대라는 말은 아무래도 진실인 듯하다.(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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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나치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순전히 내 머릿속에만 떠오르는 망상일 경우가 많지 않은가. 지나친 자기 검열보다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방은 내게 관심도 없고 그러므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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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행은 추억이라는 다리를 건너 결국 꿈이 될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그 시절 공기 속에 스며있던 특유의 냄새와 피부를 스치던 바람, 미묘하게 다른 태양의 온도와 나무들, 환하게 웃던 누군가의 미소 같은 것들이 모두 꿈은 아니었을까?(202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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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또 한 계절을 살아내고.(2025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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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마지막 인사와 시작 인사 사이에 멀뚱히 서 있었다. 때마침 비가 섞인 눈이 몰아쳤다. 일이야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지금까지 늘 그래왔으므로) 이상하게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늘 걱정은 가깝고 안도는 가장 멀리 있으므로.(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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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올라온 풍경 사진들을 보다가 문득, 나는 늦은 오후 같은 사진들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는 걸 깨닫는다. 겨울이 아니라 여름의, 뜨겁던 열기가 한 풀 꺾인, 늦은 오후의 풍경들을. 그런 사진들에는 사물의 모서리가 닳은 듯 뿌옇고 아련하며 그 속에 지친 기색과 어둠이 스며들어 있다.(202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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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때문이었을까? 오늘은 하루 종일 흐렸고, 새초롬하게 추웠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과장된 것, 노력의 산물일 뿐이었다. 같이 밥을 먹던 누군가는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 않아 다른 이들에게 오해를 산다는 말을 했다. 나는 내심 그가 부러웠다.

 

나는 내 우울과 두려움, 권태를 가리기 위해 늘 있는 힘껏 미소를 짓고, 있는 힘껏 친절을 베풀고, 있는 힘껏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하는데, 그는 그런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어차피 오해를 받는다면, 그가 받는 오해가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아, 오해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미소 짓지 않고, 친절을 베풀지 않으며, 예의 바르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감정 표현이 심심하다는 말이다. 멋진 풍경 앞에서도, 맛있는 음식 앞에서도, 정성스러운 선물 앞에서도 그는 늘 한결같이 별 거 아니라는 표정과 대답을 한다고 했다.(202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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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매일 시험에 드는 기분인 걸까.(2025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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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말할 수 있음을 의미했고, 말할 수 있음은 자유였으며, 영영 부족한 존재인 것만 같은 그녀의 두려움은, 생전 처음으로 사라졌다. -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중에서

 

내게 사랑은 말할 수 없음을 의미했고, 말할 수 없음은 구속이었으며, 영영 부족한 존재인 것만 같은 내 두려움은, 생전 처음으로 너무도 생생하고 당당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사랑이란 무엇인가.(2025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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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승리했다,라고 말하게 될까? 상식이 몰상식을 이겼다,라고 말하게 될까? 지금껏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결코 당연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20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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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한테서 올리브 오일을 선물 받았는데 맛과 향이 좀 달라서 성분을 봤더니 트러플이 들어간 것이었다. 어쨌든 올리브 오일이니까 다 비슷하겠지 싶었는데 요리에 사용해 보니 트러플 향이 너무 강해서, 완전히 다른 요리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으니,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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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오랜만에 굳게 닫아둔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저번 주에 물을 주지 않아서일까? 난초 이파리가 말라서 떨어져 있었다. 마르고 변색된 이파리들을 잘라주고, 물을 주었다. 마른 옷을 개어 넣고, 청소기를 돌렸다. 갑작스럽게(동생은 늘 갑작스럽다) 동생이 아버지를 만나러 온다는 전화를 받았지만 나는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그래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나는 이기적인가? 하지만 나 혼자 있는 이 시간을, 이 충전의 시간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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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각자의 '어쩔 수 없음'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생각. 어쩔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202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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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생물학자인 그는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생물종의 다양성이 파괴되는 현상에 대해서 경고했다. 그리고 물었다. "다양성은 왜 있어야 하나요?" 그는 그에 대한 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강의 자체가 그 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이란 원래 다양한 것이고, 우리는 그 다양한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그 다양한 것들 중의 하나인 인간이, 오직 인간 스스로를 위해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으니, 그로 인한 재앙은 우리 인간들이 치러야 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대가일 것이라고.(202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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