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네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했다 하여 주말을 이용해 다녀왔다. 대구는 내게 서울과 다름없이 큰 도시다(서울 사람들은 대구를 그저 지방, 혹은 시골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인구와 차량, 건물 등 모든 것들의 밀도가 적은 지역(소위 시골)에 살고 있는 내게 대구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도시인 것이다. 한두 달에 한 번씩은 가게 되는 도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건 대구라는 도시의 고유한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저 대도시라는 공간이 주는 특유의 답답함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늘 생수를 찾는다. 마치 생명수라도 되는 것처럼.
동생은 그런 대도시의 아주 번화한 곳에, 그러니까 주상복합 건물의 22층에 살고 있었다. 건물은 무척 컸고, 병원이 제법 여러 개 입주해 있었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임대 현수막이 많이 걸려 있기도 했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고모와 사촌 동생은 동생이 말해준 집의 입구를 찾지 못해 건물 바깥을 빙빙 돌았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불친절한, 미로 같은 구조였다. 결국 동생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고, 우리는 동생을 가이드로 하여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동생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저 높은 곳에 있으면 대구 시내가 다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올라가 보니 다른 건물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탁 트인 전망은 아니었다. 그 아래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도로와 그 위를 무수히 지나다니는 차량들. 시내 중심에 있는 건물이어서 그런지,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쉴 새 없이 자동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란다 앞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가만히 식탁 의자에 가 앉았다. 동생이 창문을 닫으니 거짓말처럼 외부의 소음은 사라졌다. 그렇게 우리는 사방에 자동차들이 다니는 도로의 중간에 우뚝 선 건물의 22층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간의 근황과 일터에서의 고충과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근처에 막창집이 유명하다고 하여 그리로 향했다. 가는 길에 유명한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을 지나쳤다. 우리들은 막창에 하이볼을 마시며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유명하긴 한 모양인지 가게에 사람들이 많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한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살아보지 않은 타인의 삶에 대해 너무 쉽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거칠게 말해서, 결혼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너는 결코 인생을 알지 못해,라고 너무나 쉽게 말한다고.
그런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한 사람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하고, 결혼한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삶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할 뿐이지 않은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친 사람만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이 아닌가? 그러자 아버지는 그건 그저 네 생각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네가 말하는 건 일반적인 생각은 아니야. 너는 특수한 상황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나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마치 그 삶은 중요하지 않고, 겪어보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니까, 아버지로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는 사람의 괴로움과 절망에 대해서 아버지는 알고 있을까? 감히 그것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라고 말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렇지 않은 삶에 대해서 짐작할 수조차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것이 전부요, 진리이자, 보통 사람의 삶이라고 믿고 살아왔으니. 나는 매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거대한 벽을 느끼지만, 그 벽을 깰 수는 없다. 아버지로서 자식이 안타까워 말하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니. 하지만 안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막창을 입에 넣고 묵묵히 씹었다. 막창의 맛에 집중했다. 막창은, 사람들로 붐비는 그 가게의 막창은 내가 먹어본 막창 중에 가장 맛있었다.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고, 겉은 파삭한데 질기지도 않고 어쩜 그렇게 부드러운지.
그렇게 막창을 먹고 나와 커피를 마시러 갔다. 동생은 하이볼을 서너 잔밖에 못 마신 것이 아쉬운지 2차를 가자고 했지만,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커피를 마셨고, 좀 더 이야기를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어쩌면 동생의 삶을 보통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아마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내가 안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보통의 삶일까. 혹, 누군가 그것을 보통의 삶이라고 한다면,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도로에 가득차 있는 자동차의 무한 늪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거리의 소음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동생에게 큰 소리로 잘 지내라고 말했다. 너는 너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잘 살아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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