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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는

여름이 도래하면 나는 슬퍼진다. 원래는 한여름의 작렬하는 태양이 환하게 비치면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위안을 얻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로 생각하고 느끼는 내 감각의 영원히 묻히지 못한 시신들과, 외부에서 거품처럼 부글거리며 넘쳐나는 삶들 간의 대비가 너무도 날카롭다. 이것은 우주라고 알려진 국경 없는 조국에서, 비록 내가 직접 탄압을 받는 건 아니지만 영혼의 비밀스러운 신념이 모욕당하는 그런 폭정 아래 살아가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나는 서서히,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게 된다.(769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 페소아가 슬퍼한 여름이 이제 가려한다. '영혼의 비밀스러운 신념이 모욕당하는 그런 폭정 ..

불안의서(書) 2023.09.10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

"그렇다면 제가 달라져야 이런 풍경이 바뀐다는 뜻인가요?"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구요. 서핑을 배우거나 봉사활동을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27쪽,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34~35쪽,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언제부터인가 그는 세상을 거울이..

삶이 거대한 농담이라면

얼마 전 밀란 쿤데라의 타계 소식에 다시 그의 책을 펼쳐 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책이라고는 저 유명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다였으니.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을 과연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뭐 어쨌건. 변명을 하자면, 나는 너무 일찍 그의 책을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이른 나이에(그의 책을 도무지 소화하기 어려운 나이에) 나는 그의 책을 읽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글쎄... 다시 『농담』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읽은 그의 소설은 처음 그의 책을 읽었을 때보다는 잘 읽혔다. 그만큼 내가 컸다는 뜻(여러 가지 의미로)일 수도 있고, 책이 재밌었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의 각 장은 이 책의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고, 내용..

흔해빠진독서 2023.08.27

밀란 쿤데라, 《농담》, 민음사, 2011.

"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18쪽) * 헬레나, 당신은 잘못 살고 있군요, 그러고 나서 그는 선언했다,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다르게 살겠노라, 삶의 기쁨들을 좀 더 누리겠노라 결심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답했다, 나는 그의 말에 조금도 반대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쁨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요즘 유행하는 그 모든 우울한 것들이나 울적함 같은 것보다 나를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은 없다고, 그러자 그는 그런 신념의 선언은 아무 의미도 없다, 기쁨의 신봉자들이 대개 제일 음울한 사람들이다라고 답했다,(42~43쪽) * 나는 내 기억들로부터 달아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기억들은 나를 포위..

단상들

* 갑자기 이 모양 이 꼴로 살다가 죽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 세상 서럽고, 죽어서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이 모양 이 꼴이 어때서 라는 생각이 들면 그땐 그런대로 괜찮아지는 것이다.(20230710) * 예고편도 그렇고 이번에 공개된 예고편을 보면서 새삼 느낀 것. 티모시 샬라메가 원래 그런 목소리였던가? 한껏 소리 지르는 장면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새삼 낯설어서, 이건 누구 목소리지? 했다.(20230713) *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하니 구차한 기분이 든다. 오해하라면 오해하라지. 어차피 우리는 오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사라져 갈 뿐인 존재들이 아닌가. 오해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오해가 풀릴 날도 있을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아무도 ..

입속의검은잎 2023.08.15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얼음장 밑을 흘러왔다고 했다. 힘들었던 건 내가 아니라 겨울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첫사랑은······' 어쩌구 하는 70년대식 방화(邦畵) 속에서 눈덩이를 던지며 사랑을 좇던 늦은 오후에 어느새 너는 서걱이는 마른 대숲을 지나 내 곁에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무릎이 아프다고. 이젠 정말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녹슨 편지함 속에서 울었다. 그런 밤마다 나는 어머니가 아닌 너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따뜻했던 몇 가지 기억들을 다시 돌아온 너에게, 말 없는 눈발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쓸쓸함을 묻지 않으리라. 어느 날 막막한 강변로에서 다시 너를 잃어버리고 창문 틈에 너는 기다린다는 연서를 꽂아놓을 때까지, 네가 내 옆에 없음을 알고 경악할 때까지 낡은 자명종의 태엽을 감으며, 너는 사라질..

질투는나의힘 2023.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