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994

비타 색빌웨스트, 『모든 열정이 다하고』, 민음사, 2023.

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이름을 버지니아 울프 때문에 알게 되었다. 아니, 그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게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어쨌든 버지니아 울프만 알고 있었던 내게, 울프의 소설 『올랜도』의 실존 인물이었다고 하는 비타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그의 소설을 찾아서 읽었다. 이 소설은 역자가 말한 것처럼 '남편과 사별하고 자기만의 평온을 찾아 나선 여든여덟 살 노인'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레이디 슬레인은 총독 부인으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명예와 부를 누렸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모든 열정이 다하고 난 뒤에 찾아온 그것을 어떻게 해..

흔해빠진독서 2023.07.02

비타 색빌웨스트, 《모든 열정이 다하고》, 민음사, 2023.

외모란 얼마나 기이한가, 또 얼마나 부당한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외모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는 타인을 견뎌야 한다.(19쪽) * "···나는 완전히 내 멋대로 살 생각이야. 노년을 만끽하려고 말이다. 손주들은 출입 금지야. 너무 어려. 마흔넷 넘은 애가 하나도 없잖니. 증손주들도 출입 금지다. 그 애들은 더 심각하지. 난 괄괄한 젊은 애들은 질색이야. 무슨 일을 하든 굳이 왜 하는지 이유를 알려고 난리지, 묵묵히 하는 법이 없어. 그리고 그 애들이 아기를 낳아도 데려오지 말라고 해라. 그 어린 것들이 별일 없이 삶의 막바지까지 다다르려면 얼마나 치열하게 발버둥질해야 할지 생각나서 괴로울 테니까. 그런 건 다 잊고 살려고 해.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사람들만 곁에 두고 살고 싶구나.(50쪽) ..

그 푸르던 여름의 시작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온통 녹색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고흐의 그림이 걸려 있고, 창밖으로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나무가 보이는 통나무집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집안에 머무는 내내 나무 냄새가 났다. 햇살, 바람, 나무, 구름, 산...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여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들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조금씩 닳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니겠는가. 시간은 우리들을 저 멋모를 대학생 때로부터 얼마나 많이 떨어뜨려 놓았는지. 이번에도 우리들은 만나면 늘 하는 이야기를 했지만, 예전과는 달리 그것은 조금 지쳐 보였고, 오래 전의 흥미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듯 느껴졌다. 오래된 나무처럼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씩..

어느푸른저녁 2023.06.28

누가누가 더 행복한가

당신은 그 사람보다 이 사람이 더 행복한 것 같다고 했지요. 누가 봐도 그렇지 않냐고. 하지만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아니,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행복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뿐. 허나 그 조차 확실한가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잘 아는 걸까요. 행복이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순간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던가요? 내가 나 자신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순간, 우리는 불행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행복하지 않은 상태라고만 할게요. 그것은 같은 말인가요? 글쎄요. 그러니 우리, 타인의 행복을 비교하지 말아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행복한가 묻지 말아요. 타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어느푸른저녁 2023.06.22

단상들

* 모 시인의 시집 출판과 관련한 설문조사 항목을 보고 있으니, 문득 내가 대학 신입생 시절, 설문조사를 한다며 다가왔던 어떤 이가 생각났다. 그의 목적은 결국 전도였다. 전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설문조사를 빌미로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달까,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문조사란 그런 것인가? 그것은 누군가를 교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특정 혹은 불특정 대상의 생각을 듣고자 함이 아닌가? 차라리 입장문이면 어떤가. 당당하게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거나 우매한 민중을 가르치기 위한 것을 설문조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독자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20230518) * 어쩌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한 것은 불안이었을까. 퇴근길, 불안의 어두운 그림자가 또 나를 뒤따른다. 사라진다면 ..

입속의검은잎 2023.06.17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인 '인생'과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인 '시'에 대하여(신형철, 『인생의 역사』)

'인생'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이다. ···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 중에서 * '그'는 결코 쉽지 않은 말을 생각보다 쉽게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의 문장을 통하면 꽤 어렵게 느껴지던 '시'도 생각보다 쉽게 혹은 다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무척 자상하고 사려 깊은 선생님 같은데, 마치 오래전 내가 무척 좋아했었던 것만 같은 그런 선생님 말이다. 시를 이야기하면서 인생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그의 탁월함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과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혹은 기꺼이 알게 만드는 데 있다. 그는 분명 시인이나 소설가는 아니지만, 언어의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조금은..

흔해빠진독서 2023.06.10

그 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물큰한 물냄새가 났다. 바닥을 보니 비 온 흔적이 있었다. 아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곧 퇴근 시간이었다. 정리를 하고 사무실을 나오니 주위는 평소보다 조금 어두워져 있었고, 저 멀리 하늘에서 그르렁대는 소리가 났다. 비가 한바탕 오려나? 오랜만에 맡는 비냄새가 싫지 않았다. 초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불쾌할 정도의 습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바람이 선선하기까지 했다. 나는 조심스레 운전을 하며 사무실 건물을 빠져나왔다. 얼마쯤 왔을까? 빗줄기가 조금씩 세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고압의 호스로 물대포를 쏘듯이 비가 내렸다.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올렸다. 그렇게 얼마쯤 왔을까? 점차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집에 거의 도착해서는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언제 비가 왔..

어느푸른저녁 2023.06.08

듀나, 《그 겨울, 손탁 호텔에서》, 퍼플레인, 2022.

내 생각에 세상 물정을 충분히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 거 같아. 다들 각자 자기 우물 속에서 사는 거야. 어떤 우물은 다른 우물보다 조금 크겠지만.(45~46쪽,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중에서) * 그는 이 영화가 오래전에 사라진 호텔의 유령 속에 거주하는 역사의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매혹적이었고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영화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93쪽, 「그 겨울, 손탁 호텔에서」중에서) * "··· 난 뭘 믿냐고요? 비행접시를 타고 온 어느 친절한 외계인이 언니를 발견하고 이 더러운 나라에서 구출해주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쯤 안드로메다 성운 어딘가에서 모든 이의 사랑을 받으며 온갖 신나는 모함을 하고 있고 지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