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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의 기다림

지니가 당신에게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한다면 당신은 무슨 소원을 빌 것인가? 여기 삼천 년 만에 깨어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지니가 앞에 있다. 어쩌다 지니라는 거대한 복권에 당첨된 중년의 시니컬한 여교수(틸다 스윈튼)는 소원을 빌 생각은 하지 않고 당장 그가 물러가기를 바란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지니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소원을 빌도록 애원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마치 천일야화처럼 들려준다. 헌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다름 아닌 지니의 사랑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마음을 열지 않던 교수는 점차 그에게 동화되고, 결국 그에게 자신을 ― 오래전 그가 열렬한 사랑을 바쳤던 여성들에게 그랬듯 그렇게 ― 사랑해 달라는 소원을 빈다. 이 영화는 사랑에..

봄날은간다 2023.08.04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울프와 발저의 산책이 좋은 이유는 그들이 걷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었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95쪽,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중에서) * 내가 정지돈을 읽게 된 것은 배수아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배수아가 번역한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때문에. 그의 첫 소설집 『내가 싸우듯..

흔해빠진독서 2023.07.30

전진희 -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요(Feat. 박지윤)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요 어차피 돌아서면 아닐 마음인 거 다 알아요 모든 게 모든 게 가벼워요. 날 슬프게 해요. 내게 보고 싶다는 말하지 말아요 손꼽아 기다린 숫자들은 다 허상이겠죠 모두가 모두가 쉬운가 봐요. 날 아프게 해요. 흩어질 말들은 다 소용없어요 끝을 알고도 쓸쓸히 반짝일 수는 없는걸요 이토록 미약한 내게 손을 내밀어 줘요 흩어질 말들은 다 소용없어요 쓰여지지 않은 사랑은 지울 수도 없는걸요 이토록 미약한 내게 손을 내밀어 줘요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요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요

오후4시의희망 2023.07.30

농담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 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그 부분을 읽고 며칠 뒤에 밀란 쿤데라가 별세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나는 오래전에 읽은 그의 소설 속 문장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언제 사놓았는지 모를, 아직 읽지 않은 그의 『농담』을 새삼스레 꺼냈다. 이제 정말 『농담』을 읽어야 할 때인가, 생각하며 책의 표지를 물끄러미..

어느푸른저녁 2023.07.24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문학동네, 2021.

얼마 전 한 지인이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올렸다. 되면 한다. 응? 다른 지인은 말을 하다가 실수를 했다. 길이 있는 곳에 뜻이 있다. ······그렇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5쪽) * ―절망적인 삶이 재능인가요? ―어떤 경우에는. 그렇다. 어떤 경우에는 망한 인생도 재능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인생이 망하지 않았는데 망했다고 느낄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망했는데 희망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중 최악은 뭘까요?(29쪽) *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문장력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내심이 있거나 책을 좋아하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착각이다. 이건 굉장히 슬픈 지점이다. 만약 작가를 만드는 요인이 남다른 언..

비오는 날 카페에서

끊임없이 비가 온다. 일이 있어 나갔다가 카페에 들렀다. 창밖으로는 마침 비로 인해 불어있는 강이 보였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으로는 재난문자가 계속해서 오고 있었고, 폭우로 인한 피해 소식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창 안쪽에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었으나, 창 밖 저 멀리 어딘가에서는 산사태가 나고, 건물이 무너지고, 급류에 휩쓸려 사람들이 실종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둔 그 아득함과 두려움, 투명함과 불투명함, 선명함과 흐림, 안락함과 고통, 침묵과 아비규환. 그것들은 서로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운가. 창 이쪽에서 황토색의 강물을 바라보며 쓸데없는 생각에 잠겼는..

어느푸른저녁 2023.07.15

저마다의 항로를 갖고 있는 외로운 항해사처럼

높은 곳에서 새벽의 M시를 내려다본다면, 형광등의 창백한 빛에 둘러싸인 편의점은 네모난 모양의 부표처럼 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안전하면서도 풍요로운 영역이 있다는 걸 알리는 부표인 셈이다. 실제로 새벽의 편의점 안에서 바라보는 문밖의 어둠은 물결처럼 일렁이곤 했고, 어둠을 가로질러 담배나 생수를 사러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항로를 갖고 있는 외로운 항해사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 조해진, '산책자의 행복' 중에서(소설집 《빛의 호위》 수록) * 편의점만 가면 늘 필요한 물건만 빨리 골라서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삼각김밥과 음료를 계산한 뒤 물건을 손에 들기도 전에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를 들었기 때문일까. '편의점에서 길을 잃다' 같은 제목의 소설이..

어느푸른저녁 2023.07.13

단상들

*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라는 말은 얼마나 힘이 없고 무색한가.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마음을 정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없는데 반드시 원해야 하는 상황이란 얼마나 난감한가.(20230616) * 어떤 이가 서점에 갔다가 배수아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나는 무슨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어떤 책을 보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20230618) *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시간들을 지나고 있다. 책도 읽히지 않고, 영화도 시들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은 더욱 하기 싫은, 그런 상태. 며칠 야근을 해서 좀 지쳤기 때문일까. 아님 본격..

입속의검은잎 2023.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