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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은 세 번 핀다고

동백이 지천인 곳에 다녀왔다. 발 디디는 곳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동백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꽃은 거의 진 채였지만. 동백꽃을 이렇게나 많이,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닥에 흐드러지게 떨어진 붉은 꽃을 밟으며 동백나무 숲길을 걷는 일은 특별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경이로움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어떤 비감(悲感)을 두른 것이었다.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해설사는 말했다. 동백은 세 번 핀다고. 처음에는 나무에, 두 번째는 바닥에, 세 번째는 우리들 마음속에. 참으로 적절한 말이 아닌가 생각했다. 바닥에 '핀' 붉은 동백꽃을 밟을 때마다 느껴지던 그 아득한 아찔함에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리. 누군가는 동백꽃을 피꽃이라 했다지. 나는 순간..

토성의고리 2023.04.14

아무도 알지 못한 자의 죽음

유명한 사람의 죽음은 파장이 커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사람의 죽음은 어떠할까. 그 죽음은 무엇이며, 어떤 풍경일까.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한 사람과 그의 인생이라는 것은. 얼마 전에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듣고 있으니 공교롭게도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사람과 아무도 알지 못한 자의 죽음이란 무엇인지.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잊힌다는 것은 무엇인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떠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고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존재할(것만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끝내 잊힐 존재들이 아닐까? 문제는 언제나 시간인 것이다. 시..

어느푸른저녁 2023.04.09

단상들

* 같은 책을 읽더라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나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부분을 누군가는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는가 하면,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래서 더 재미있는 거겠지. 하지만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재미와 놀라움보다, 비슷한 생각에서 오는 동질감이랄까, 공감의 연대가 때론 그립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이 헛헛한 기분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처음 깨달았다.(20230328) * "이젠 떠날 때가 온 것 같아. 너무 오래 있었어." "그만큼 정이 많이 들었을 텐데."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정을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만 강해져.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란 심플하면 할수록 좋은 것 같아. 정이..

입속의검은잎 2023.04.09

길복순

오로지 전도연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다. 아, 이렇게 말하면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가 나온 영화를 모두 찾아서 볼만큼 그녀의 열렬한 팬은 아니니까. 그럼 이렇게 말해야 할까? 전도연이 중학생의 엄마이자 전문 킬러역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어찌 안 볼 수 있단 말인가? 포스터마저 멋진데! 화려한 액션을 기대했다면 조금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액션이 많고 화려하긴 하다. 하지만 그 화려함은 합이 잘 짜인 쿵푸를 볼 때의 그것이 아니라 난장 액션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불협화음을 듣는 것 같은, 현실적인 액션을 볼 때의 즉흥적인 재미가 있다. 하긴 청부살인업자의 싸움 기술이 과시적일 필요는 없으니까. 극 중 길복순은 말한다. "양손 쓰는 건 좋은데 액션에 토를 너무 많이 달았네." 그래, 액..

봄날은간다 2023.04.01

비밀의 문 안쪽을 향해 스쳐 지나가는

나는 비밀의 문 안쪽을 향해 스쳐 지나가는 시선을 선호한다. 그런 순간의 언어적 확장을 선호한다. 우리에게 뭔가를 불러일으키고, 긴 하루의 서막을 알리지만, 비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시선. -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 나는 몇 년 동안 그곳을 지나다녔다. 아니 지나다녔다는 말은 맞지 않다. 나는 그곳을 그저 지나쳤다. 아침저녁 출퇴근 길에 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그곳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벚꽃이 만개했고, 그럴 때면 꼭 저 길을 걸어봐야지 하는 마음만 있었다. 그 마음을 한 번도 실천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마음은 있는데 왜 행동으로 옮기질 못했을까. 어제는 금요일이었고, 날씨가 무척 맑았고, 벚꽃이 지천에 피고 있었다. ..

토성의고리 2023.04.01

때로 어떤 종류의 꿈은 서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그동안 밀린 잠을 갚겠다는 듯 가열차게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이상하게 몸이 나른하고 정신은 멍하다. 꿈을 꾼 것도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꿈속에서 어떤 문장들이 떠올랐는데 그 역시 깨어남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오로지 어떤 것들을 떠올렸다는 느낌, 그리고 빠르게 사라져버렸다는 느낌만이 남아있다. 이것이 잠의 찌꺼기 혹은 꿈의 앙금인가? 사라져 버린 꿈들 사이로 문득 하루의 기억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사소한 모든 것들을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거나. 하지만 꿈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깨고 나면 사라져 버리는 그 꿈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것은 불가능한 꿈인가? 꿈속에서 겪은 이야기나 떠오른 문장들은 그저..

어느푸른저녁 2023.03.31

나는 끝내 나의 일부를

나는 쉬는 날의 거의 대부분을 집에서 혼자 보내고, 그것이 내게 가장 행복감을 주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을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단 만나기 전까지 나는 수천 번의 후회(만나자는 약속에 대한)와 수천 번의 아쉬움(혼자 보내지 못하는 휴일에 대한)으로 몸을 떨어야 한다. 나의 주말이, 나의 유일한 휴일이 또 이렇게 사라져 버리는구나 한탄하면서. 내게 있어 혼자 보내는 주말은 일주일간 받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처방약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고 주말에만 볼 수 있음을 나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수천 번의 후회와 아쉬움 끝에 가까스로 다다른 각오. 그..

어느푸른저녁 2023.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