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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불안, 불안의 꿈

불쾌한 꿈을 꾸었다. 혹은 불안한 꿈이라고 해야 할까? 악몽이라기보다는 옅은 잠의 장막 위로 부유하는 듯한 느낌의 꿈이었다. 뭐랄까, 자는 동안 계속 신경이 쓰였다고 해야 할까. 아니, 꿈이라고 하기에도 석연찮다. 꿈이란 분절된 어떤 영상과도 같을 텐데, 나는 특정되거나 혹은 불특정 된 장면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어떤 불쾌하고도 음습한 감정의 덩어리를 느꼈던 것이다. 그것이 계속 내 잠을 방해했다. 정확히는 자면서 불쾌하고도 불안한 느낌이 지속적으로 들었다는 게 맞는 말이리라.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지만, 잠에서 나를 따라다니던 그 불안함은 떨쳐지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가. 나는 그것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저번 주에 업무상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

어느푸른저녁 2023.05.06

건물과 건물을 둘러싼 것들

* 뮤지엄 산에 다녀왔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물 안에서 안도 타다오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제임스 터렐관은 이번에도 보지 못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안도 타다오의 인기가 이렇게? 뭐랄까, 건축가의 전시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전시를 보는 것도 좋았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건물 그 자체였다. 어쩌면 그곳의 주인은 전시관 안에 있는 작품들이 아니라 건물 그 자체, 그러니까 건물을 이루고 있는 돌과 건물을 둘러싼 풍경들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곳에 있던 나무들과 담쟁이넝쿨 같은 것들 말이다. 돌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건물과 수중 정원, 푸른 나무들의 어우러짐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아주 빨리 흘러갔다. 아, 그곳에 가면 잊을 수 없는 것이 하..

토성의고리 2023.05.05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무엇이든지 마지막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어떤 슬픔을 내재하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그랬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그랬다. 물론 마블 영화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며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 안에서 각 캐릭터들의 마지막 이야기라는 것은 존재하므로, 그 시리즈의 영화들을 보면 볼수록 역시 조금은 슬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가 그저 단 한 편일 경우에는 크게 인식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세계관 속 각각의 이야기들이 시리즈로 만들어질수록 우리는 오랜 시간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커가면서 그것을 지켜보게 된다. 물론 모든 시리즈의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영화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내가 그것에 애착을 가지는 만큼 영화가 특별해지는 것은 ..

봄날은간다 2023.05.05

당신이 인정하지 않았던 당신의 일부

당신이 바랐던 것은 눈앞의 이득이었지. 그것을 위해 당신은 당신의 일부를 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당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 든 지금, 당신은 혼란스럽다. 설명하기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다. 기분이 좋지 않아. 당신은 나직이 말했지만, 나는 당신이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투에 어린 미묘한 망설임과 떨림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은 이제 인정해야만 한다. 당신이 얻은 것에 대한 대가를. 그 대가의 무게를. 얄팍한 이득만을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아 하기에 당신의 얼굴은 아직 그리 두껍지 않기에. 당신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신이 인정하지 않았던 당신의 일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만 하는 낙인 같은 것. 그렇게 우리들은 누구나 시한폭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어느푸른저녁 2023.05.01

바다를 이루고 있는 것들

* 색색의 작고 동글동글한 자갈이 있는 바다에 다녀왔다. 내 그림자와 함께. 아니, 지나가다 즉흥적으로 멈춘 바다에서 자갈을 보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자갈이 예뻐서 색깔별로 몇 개 주워 집에 가져왔다. 화분 위에 놓아둘 생각으로 들고 왔는데, 그냥 유리컵에 담아 두었다. 유리컵에 담긴 색색의 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바다의 한 부분을 집에 가져다 놓은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 바다를 보고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하는 걸까. 늘 그렇듯, 바다는 말이 없고, 우리들은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문득 저 파도의 하얀 포말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어느푸른저녁 2023.04.30

단상들

* 가지기 전에는 그리도 빛나 보이던 것이 막상 가지고 나면 금방 시들어 버린다는 것을 너는 미처 알지 못한다. 너의 열망이 크면 클수록, 그 열망으로 인해 어느 순간 네가 견디기 힘들어지게 될 것임을. 미리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고통받는다. 하지만 안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20230417) * '아무 몸도 아니고 아무 사람도 아니고 아무 사물도 아니며, 아무 곳, 아무 시간에도 있지 않은' 상태란 어떤 어떤 상태일까?(20230420) * 첫 문장이 아니라 마지막 문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니.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에 다다른 문장을. 시작의 끝과 끝의 시작을.(20230423) *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기쁨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듯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슬픔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입속의검은잎 2023.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