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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받아줄 수 있는 게 가족이라지만, 네 마음 내킴을 언제까지고 받아줘야 하는 다른 가족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니. 내 하나밖에 없는! 그 말의 폭력성을 진정 모르겠니. 편하다고 함부로 할 수 있겠니.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삼키고 또 삼켰다.(20230218) * 주중에는 주중에 해야 할 일이 있고, 주말엔 주말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쉬는 날이라고 마냥 쉴 수는 없구나. 하지만 쉬는 날 하는 일이란, 기꺼이 해야 하는 것. 늘 그렇듯 휴일은 짧고 후유증은 길터이니.(20230219) * 상담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 비슷한 걸 했다. 말하자면 내가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입장이었다. 그가 말했다. 도저히 참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서 찾아왔어요. 내가 물었다. 무엇 때..

입속의검은잎 2023.03.15

Abel Korzeniowski's Score

* 유튜브를 보다 우연히(그것은 정말 우연인가?) 이 영상을(음악가와 그의 음악을) 발견했다. 기억해 두기 위해 이곳에 옮겨둔다. 음악을 듣고 있으니 영화가 보고 싶어 지면서, 보지도 않은 영화의 장면이 마치 떠오르는 듯 느껴진다. 영화음악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가 본 영화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음악을 기억하고 다시 영화를 본다면 그 영화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두 번 봐야 한다는 말이 있는지도. 영상의 제목처럼, 섬세하고 우아한 음악들이다.

오후4시의희망 2023.03.08

놉(NOPE)

조던 필 감독의 을 보았다. 전작인 과 를 인상 깊게 봤던지라 이번 영화도 기대가 되었다. 에서의 충격적이고 명징한 스토리에 비해 에서의 당혹스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어떤 영화일지 궁금했다. 공포와 미스터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이 영화는 그러니까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영화였다. 처음에는 에서처럼 인간들의 교만과 어리석음(침팬지나 말을 길들여 볼거리를 선사하는 인간들)에 대한 우화인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은 영화라는 예술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인간에 대한 경의를 드러낸다기보다는(물론 영화를 위해 보이지 않게 노력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남매의 조상들 이야기를 들어보..

봄날은간다 2023.03.04

베를린 서가의 주인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절반쯤은 실제의 인물이면서, 절반은 이 산문의 연극적인 즉흥성을 위해서 고안된 장치입니다. 또한, 그는 글과 문학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정원과 오두막의 사람, 농부와 사냥꾼의 언어로 말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산문의 화자인 나를 일깨워주는 사람이면서 글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를 정원이란 장소로 이끈 자이기도 합니다. 그와의 대화를 미리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도 다음 글에 무엇이 등장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채널예스 인터뷰 중에서 *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을 읽고 있으니, 내게도 '베를린 서가의 주인'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한국에 머물 때, 산책길 어느 벤치에 앉아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어느푸른저녁 2023.03.04

K를 이해하기 위하여

K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K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K를 아는가? K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K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K역시 자신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K는 그 어떤 말도 먼저 꺼내는 법이 없다. 누군가 무엇을 물어보면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을 할 뿐이고 결코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지 않는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를 해도 K는 늘 혼자였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시간에 혼자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으며, 쉬는 시간에는 늘 자리에 없었고, 일과 시간에도 늘 혼자 건물의 빈 공간에서 어슬렁거렸다. 수시로 지각을 했으며,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도 일을 하는지 다른 생각을 하는지 알..

어느푸른저녁 2023.03.01

나는 꿈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페소아의 시를 읽는다. 나는 지금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이동 중이다. 페소아가 태어난 그곳. 시의 한 구절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린다. ‘나는 꿈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 여행지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생애 첫 유럽 여행이라는 것도, 스페인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포르투갈이라는 나라 때문이었다. 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내게 알 수 없는 위안과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고향이 바로 포르투갈 리스본이었던 것이다. 그런 내 떨림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페소아를 보러 간 자유 여행이 아니었기에 페소아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토성의고리 2023.02.25

단상들

* 나는 늘 나에게 열중해 있었다. 늘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제 마침내 한 번 인생의 한 토막을 살아보기를, 나에게서 나온 무엇인가를 세계 안에다 주기를,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게 되기를 열렬히 갈망했다. - 헤르만 헤세 나 역시 늘 나에게 열중해 있었다. 늘 나 자신에게. 하지만 나는 나에게서 나온 무엇인가를 세계 안에다 주기를,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게 되기를 열렬히 갈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나에게만, 늘 나 자신에게만 열중해 있었던 것이다.(20230131) * 늘 말하기 전에 몇 번 더 생각해 보자고 하면서도, 나는 늘 무심결에 말을 내뱉고 후회를 하곤 한다.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나을 때가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는 중인데, 그 깨달음과 별개로 말은 쉬 멈춰지지 않..

입속의검은잎 2023.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