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90

배수아 - 조현병 아들, 떠나간 애인…브라질의 ‘여성 카프카’는 고립 속에 이 신비한 소설을 썼다

새로운 종류의 여행법을 나는 독일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서 배웠다. 그것은 죽은 작가와 책을 향해 떠나는 여행, 여행을 통한 읽기이다. 그의 여행이 책이나 작가, 혹은 예술작품으로부터 유발되지 않은 경우란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의 브라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2015년 우리는 상파울루 공항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내게 한 권의 책을 건넸다. 내가 거기 있으므로, 거기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했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서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제목의 책이었다. 첫 페이지에는 짧은 작가의 말이 있었다. 그 첫 문장은 이랬다. “이것은 수많은 다른 책들과 다르지 않다.” 이 문장이 초대인 동시에 경고라는 ..

배수아 - 애국자들이 증오한 작가 베른하르트...공포·환각·독설 아래 그가 숨긴 것은

어느 해 겨울 나는 베른하르트의 책만 읽고 있었다. 마침내 보다 못한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당장 베른하르트 읽기를 중단하고 다른 작가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베른하르트에 심취해본 독자라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북독일의 기후 아래서, 그것도 침울하고 어두운 기나긴 겨울 내내,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시골 마을의 오두막에서 베른하르트만 읽고 있으면 마음에 병이 들기 쉽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책 속에서 베른하르트는 독설을 퍼붓는다. 그의 음산한 저주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향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망쳐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로테스크한 연극조로 과장되었다. 절반쯤 광증을 가진 자의 기나긴 독백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수목한계선 위의 황폐한 고원처럼 끝이 보이지 ..

배수아 - "입에 포도주를 붓자 소녀가 죽어버리고"...시대가 질식사시킨 작가의 독백

독일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도저히 잊지 못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은 책이 있는데, 주변의 친구들 중 아무도 그 책을 읽었다는 이가 없어서 매우 놀랐던 경험이 있다고. 그의 주변인들이 모두 어떤 식으로든 문학 관련자인 것을 생각하면 그의 놀라움은 당연하다. 어느 날 그는 책들로 가득한 방에 초대받았다고 했다. 사방 벽의 책장을 채운 것은 주어캄프 출판사가 현대 세계문학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을 선정해 심플한 디자인으로 출간한 비블리오테크 주어캄프(BS) 시리즈였다. 책등을 하나하나 살피던 그는 처음 보는 작가의 책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책을 펼친 후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

배수아 - 詩를 지운 문학이 포르노로 읽히고 말 때...뒤라스의 '연인'

30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라고 나는 어느 책의 첫 문장을 썼다. 대학 시절의 어느 날, 나는 개가식 도서관 서고를 산책하다가 처음으로 연인과 마주쳤다. 도서관의 문학 코너는 대학생인 내가 가장 사랑하던 장소였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혹은 때때로 강의가 있는 시간이라도 나는 거의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곳은 내가 아는 단 하나의 도피처였다. 다름 아닌 젊음과 청춘으로부터의 도피처. 나는 책들 사이를 거닐면서 커다란 유리창이 석양빛으로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저녁까지 오후 내내 이어지는 산책을 했다.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책들을 건드리면서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연인. 그는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첫 만남의 순간부터 나는 연인이 뿜어내는 숨 막히는 호흡을 실제로 들이마실 수 있었다. 그것..

듀나,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구픽, 2022.

수많은 영화는 편견의 범죄 증거입니다. 앞으로 여러 번 이야기할 텐데, 실제 세계와 이를 투영한 동시대 영화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돕니다. 이를 제대로 읽으려면 여러 시대, 여러 공간의 실제 작품을 보면서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어요. 간접 정보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결국 남의 눈이고 남의 생각이니까요. 오독하고 실수하더라도 일단은 직접 보는 수밖에.(16쪽)  *  우리가 옛날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영화는 지난 1세기 넘게 쌓아온 영화사의 끄트머리일 뿐입니다. 지금의 영화만 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영화적 체험이 과거의 영화들 속에 있습니다.(24쪽)  *  걸작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경험은 그냥 빈약해요. 이건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걸작만 보시나요?..

빛과 실(한강 - Nobel Prize lecture)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등), 은행나무, 2024.

어느 날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글에서, 바우키스가 나무로 변하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으나 물과 바람과 풀과 햇빛과 새소리 그 마지막 느낌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아마도 그 구절이 〈바우키스의 말〉의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가장 마지막 구절로만 이루어진 하나의 단편처럼, 〈바우키스의 말〉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최후의 순간에 말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쓰기 시작했다.(16쪽, 수상소감 중에서)  *  나는 쓴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을 향해 귀 기울이면서. 바우키스의 말, 누군가 그것을 들었을까.(16쪽, 수상소감 중에서)  *  내가 쐐기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쐐기풀 차가, 산책길에 한 아름씩 꺾어오는 불가리스 쑥이, 여름 내내 어디에나 지천인 황금빛 골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별의 시간》, 암실문고, 2023.

나는 살기 위해 타인들을 필요로 하므로, 나는 바보이므로, 나는 완전히 비뚤어진 자이므로, 어쨌든, 당신이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그 완전한 공허에 빠져들기 위해 명상 말고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명상은 결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그 자체만으로 목적이 될 수 있다. 나는 말없이, 공허에 대해 명상한다. 내 삶에 딴죽을 거는 건 글쓰기다.(8쪽)  *  나는 세상을 짊어지고 있으며 그 일에는 어떠한 행복도 없다. 행복? 나는 그보다 멍청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18쪽)  *  그렇다, 나의 힘은 고독에 있다. 나는 폭우나 거센 돌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밤의 어둠이니까.(29쪽)  *  우리는 오직 현재 속에서만 산다. 그건 언제나 영원히 오늘이기 때문이고, 내일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