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문학동네, 2021.

그래, 듣기만 해도······ 달리기를 잘할 것 같은 이름!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달리기를 잘할 것 같은 이름이란 과연 뭘까?(18쪽, 「여름방학」 중에서) * "나는, 음,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지." 나는 그렇게 말해 보았다. 그리고 차에서 펜을 꺼내와 '내 자리'라고 쓰인 낙서 옆에 새 낙서를 했다. '그래, 니 자리.' 그러고 나자 그냥 어른이 된 나 자신이 그다지 실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55쪽, 「여섯 번의 깁스」 중에서) * 장례식 도중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가 관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자 딸이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거기에서 읽었다. 자신 때문에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 죽고 싶지 않을까? 그래도 살아난 것에 감사하게 될까? 그 이야기만..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마음산책, 2013.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51쪽) *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67쪽) * 그들의 삶은 함께 꾸려졌고, 함께 짜였다. 그들은 마치 배우들 같다. 자기밖에 모르는 성실한 배우들. 오래된, 불멸의 연극 대본 이상의 세상은 없는 배우들.(78쪽) * 아이들은 우리의 작물이고, 밭이고, 땅이다. 어둠 속에 풀려난 새들이다. 새로이 회복된 실수다. 그래도 아이들은 우리보다 삶을 조금 더 잘 알고 조금 더 성공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

황정은, 《백百의 그림자》, 창비, 2022.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10쪽) * 무재씨, 춥네요. 가만히 서 있어서 그래요. 죽겠다. 죽겠다니요. 그냥 죽겠다고요. 입버릇인가요. 죽을 것 같으니까요. 무재씨가 소매로 풀 즙을 닦아내고 똑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죽을까요? 여기서,라고 너무도 고요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었다. 새삼스럽게 무재씨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조금 키가 커서 내 눈높이보다 한뼘 반 정도 위쪽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었다. 평소엔 좀 헝클어진 듯 부풀어 있던 머리털이 빗물에 젖어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교씨,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말아요.(12~13쪽) *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소년 무재의 부모는 개연적으로, 빚을 집니..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바다출판사, 2018.

우리는 모두 자기 뇌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 그로 인한 자기중심주의는 모든 인간의 기본 설정이라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한계와 지루한 일상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12쪽, '엮고 옮긴이의 말' 중에서) * 대중적 호화 크루즈 여행에는 견딜 수 없이 슬픈 무언가가 있다. 견딜 수 없이 슬픈 것이 으레 그렇듯 이것은 정체를 파악하기는 엄청나게 어렵고 원인은 복잡하지만 결과는 단순한 듯하다. 그 결과란, 내가 네이디어 호에서―특히 밤에, 배의 놀이 활동과 안심과 즐거운 소음이 다 그친 뒤에―절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워낙 남용되어 이제 진부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지한 단어이고, 나는 지금 이 단어를 진지한 의미로 쓰고 있다. 내게..

배수아, 「부엉이에게 울음을」(『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수록)

두 번째 이혼을 결정했을 때 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막연하게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115쪽) * 마치 누군가, 배우와도 외국과도 관련이 없이, 그렇게 즉흥적으로 타자기에 쳐 넣었을 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임의의 글자와도 같은 것.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서 더욱 매료시키는 것.(115쪽) * 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내가 오직 다락방에서 생애 초반기의 대부분을 홀로 보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안에 아무렇게나 쌓여있으면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들을 홀로 들춰보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들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며 결정적인 어휘는 ..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2021.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 중에서 * 오늘도 암스테르담엔 노란 햇빛 비치고 플로렌스에선 그리운 꽃들이 피어난다. 언제나 가볼 수 있을까 죽음다운 죽음이 환히 비치는 곳으로 너의 웃음이 시원한 사이다 한 잔으로 쏟아지고 우리의 고질적인 사랑이 영화처럼 쉽게 끝났다가 심심하면 또 영화처럼 쉽게 시작될 수 있는 곳으로. - 중에서 *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 중에서 * 슬퍼하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 그러나 모든 기억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 밤은 오고 나는 나..

페터 한트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아트북스, 2020.

지금 내게 떠오르는 예는 모두 풍경화들이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아름다운 침묵의 공간, 위협이 도사리는 반수면 상태와도 같은 풍경. 특이하게도 그런 그림들은 모두 연작으로 그려졌다.(19~20쪽) * 나는 누군가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리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혼자인 것이 행복했다. 나는 '그 길'을 걸었다. 그늘진 도랑에서 '그 시냇물'을 보았다. 나는 '그 돌다리'에 섰다. 거기 바위의 균열이 있었다. 소나무들이 있었고, 옆길에 줄지어 선 모습이었다. 길의 끝에는 까치 한 마리가 커다란 흑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나무 향기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영원히". 나는 걸음을 멈추고 메모했다. "무엇이 가능한가 - 바로 이 순간에! 세잔의 길에는 침묵."(40~41쪽) * 타인의 ..

한강 “혐오는 숨 쉬는 공기속에…직면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다면 위험”

서울국제도서전에서 4년 만에 대중 앞에 나선 소설가 한강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서로 연결 막연한 낙관 대신 실낱같은 희망을…살아있는 한 빛을 향해가며 싸워야 글 쓰는 것이 나의 할일…다음 작품 집필 중 “혐오는 아주 가까이 있어요. 숨쉬는 공기 속에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요즘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절망할 때도 많아요. 하지만 공기 속에 흐르고 있는 혐오를 직면하고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면 혐오와 절멸은 이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오랜만에 독자들 앞에 섰다. 4일 서울국제도서전이 진행중인 서울 코엑스에서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 만남’을 주제로 강연했다. 장편소설 의 한 구절에서 주인공 경하가 제주 4·3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