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90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민음사, 2007.

어느 날, 공중 집회소의 홀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이미 노인이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당신은 젊었을 때가 더 아름다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지금의 당신 모습이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의 당신, 그 쭈그러진 얼굴이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9쪽) *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얘기는,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을 때의 얘기다. 메콩 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그 영상은 강을 건너는 동안 줄곧 이어졌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고, 그 나라에는 계절이 없었다. 우리는 오직 한철뿐인, 무덥고 단조로운 계절에 묻혀 있었다. 봄..

이민진, 《파친코》, 인플루엔셜, 2022.

"어딜 가든 사람들은 썩었어. 형편없는 사람들이지. 아주 나쁜 사람들을 보고 싶어? 평범한 사람을 상상 이상으로 성공시켜놓으면 돼.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법이거든."('파친코1', 74쪽) * "너는 아주 용감해, 노아야. 나보다 훨씬, 훨씬 더 용감해. 너를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파친코1', 307쪽) * "잘 들어, 이 친구야,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 나라는 달라지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여길 떠날 수도 없지.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다를 바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일본 놈이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든, 얼마나..

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까치, 1999.

몇 주일 만에 처음으로 혼자 여기서, 마침내 다시 나의 "진짜" 삶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이상한 점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캐보고 알아내기 위한 혼자만의 시간이 없는 한,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열렬한 사랑조차도 내 진짜 삶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영양분이 되기도 하고 미치게도 만드는 방해받는 시간들이 없다면, 이 삶은 삭막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맛을 완전하게 음미하는 것은 내가 여기 혼자 있고 그리고 이 집과 내가 이전의 대화들을 다시 시작할 때뿐이다.(7쪽) *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꽃들이 정말로 보인다. 나는 그것들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것들은 어떤 영혼처럼 느껴진다. 그것들이 없다면, 나는 죽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할까? 얼마간..

조지프 브로드스키, 《베네치아의 겨울빛》, 뮤진트리, 2020.

나는 그곳에서 내가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맞이하러 나와 주기를 기다렸다. 그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11쪽) * 겨울은 나의 계절이었다.(13쪽) * 행복은 당신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 당신이 그것들과 마주친 순간의 감정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자유 상태에 있는 원소들이 무궁무진하다. 그 순간 나는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발을 들인 것 같았다.(16쪽) * 저온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이다.(34쪽) * 병이 아무리 위중하다고 해도, 병만으로는 이 도시에서 지옥의 환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 도시에서 악몽의 먹이가 되려면, 당신은 특수한 신경증이 있거나 그에 비견할 죄악을 거듭 지었거나 아니면 둘 다여야 한다.(..

엘제 라스커 쉴러,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아티초크, 2023.

비틀거리는 달 아래 내 갈망하는 나체의 꿈이 춤을 춘다 어두운 울타리 저편, 그윽하게 떠도는 몽유병의 아이들 (35쪽, 중에서) * 우리는 밤으로 화해하기를 원하니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53쪽, 중에서) * 모든 것이 죽었도다 단지 너와 나를 제외하고는 (78쪽, 중에서) * 항상 죽음만을 생각한다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95쪽, 중에서) * 내 심장으로 너의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너는 한번도 석양과 더불어 오지 않았다― ...나는 황금 신발을 신고 서 있었으나 (107~108쪽, 중에서) * 게오르크 트라클은 전장에서 그 자신의 손으로 죽임을 당했다. 세상은 그리도 고독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112쪽, 전문) *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지붕 아래서..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문학동네, 2023.

방은 따뜻하고 조용하다. 시계가 없어도 무음 속에서 시간은 흘러간다. 발소리를 죽이고 담장 위를 걸어가는 야윈 고양이처럼.(39쪽) *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란 없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형체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약점이나 사각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는다. "이 벽은 누가 만들었나요?" 나는 묻는다. "아무도 만들지 않았어"라는 것이 문지기의 굳건한 견해였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지."(46쪽) * 어젯밤 꿈 얘기를 쓸게. 이 꿈에는 네가 조금 나왔어. 그다지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 미안한데, 꿈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도 그럴 것이 꿈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여기요' 하고 건네주는 거고, 나 혼자서 내용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으니까(아..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

"그렇다면 제가 달라져야 이런 풍경이 바뀐다는 뜻인가요?"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구요. 서핑을 배우거나 봉사활동을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27쪽,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34~35쪽,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언제부터인가 그는 세상을 거울이..

밀란 쿤데라, 《농담》, 민음사, 2011.

"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18쪽) * 헬레나, 당신은 잘못 살고 있군요, 그러고 나서 그는 선언했다,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다르게 살겠노라, 삶의 기쁨들을 좀 더 누리겠노라 결심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답했다, 나는 그의 말에 조금도 반대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쁨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요즘 유행하는 그 모든 우울한 것들이나 울적함 같은 것보다 나를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은 없다고, 그러자 그는 그런 신념의 선언은 아무 의미도 없다, 기쁨의 신봉자들이 대개 제일 음울한 사람들이다라고 답했다,(42~43쪽) * 나는 내 기억들로부터 달아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기억들은 나를 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