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중해서 독서를 할 생각이 없었고 책을 처음부터 읽어보려는 의도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 책이 무슨 책인지조차 몰랐고 제목이나 저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나는 저절로 나타나는 어떤 글의 파편과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랐을 뿐이다. 늘 그랬듯이, 그것을 원했다. 아무런 의도도 계획도 없이 조우한 페이지를, 전체로부터 독립된 소리 혹은 운명으로서, 짧은 순간 동안 지극히 무심히 읽고, 상처도 사랑도 없이, 그대로 지나쳐가기를 원했다는 의미이다. 마치 나이프로 성서를 가르듯이.(7~8쪽) *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10쪽) * 나는 심지어 교류의 종말을, 특히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교류의 종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가 고독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