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이혜경 외, 《누구나, 이방인》, 창비, 2013.

그곳은 내 생애 가장 넓고 밝고 높은 방이었다. 그 방에서 보내는 시간을 나는 좋아했다. 정전이 잦은 저녁 어스름에 촛불을 켜놓고 방 안과 방 밖이 같은 밀도의 어둠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는 순간이 좋았다. 아침마다 동쪽 창 아래 놓은 침대에 누워 눈은 뜨지 않고 정신만 뜬 채로 햇빛에 오래 몸을 담그고 있던 순간도 좋았다.(86쪽, 김미월, ) * 몽골에 도착하고 나서 한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계획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경이로운 날들이었다. 나는 하루에 마흔여덟시간을 가진 사람처럼 살았다. 천천히 먹고, 오래 자고, 천천히 생각하고, 이따금 밖..

에두아르 르베, 《자화상》, 은행나무, 2015.

여행의 끝은 소설의 끝과 같은 슬픈 뒷맛을 남긴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일들을 잊어버린다. 나는 누군가를 죽인 누군가와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 나는 막다른 길들을 바라볼 것이다. 나는 삶의 끝에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7쪽) *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다. 나는 잊는 것을 잊지 않는다.(8쪽) * 나는 때로 비열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주위에 있을 때 더 불편하다.(12쪽) * 나는 이름들의 목록을 만들 때 내가 이름들을 잊을까 두렵다.(37쪽) * 나는 내 꿈들이 작업에 유용할 때 더 잘 기억한다. 내용과 상관없이 꿈들을 다시 상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꿈들은 너무도 체험한 일들의 기억처럼 구성되어 있어 때로 나는 실제로 일어..

데이비드 빈센트, 《낭만적 은둔의 역사》, 더퀘스트, 2022.

도보는 사람들을, 특히 북적대는 집을 피할 가장 간단한 수단이었다. 동시에 강렬한 문학적인 경험이기도 했다. 산책자들은 한적한 곳에서 읽을 책을 소지해 다양한 도보 문학에 기여했다. 보행 속도는 자연과 인간이 만든 환경을 숙고하기에 이상적이었다. 한눈 팔지 않고 움직이는 시선은 걷는 곳이 들과 숲인지 도시의 거리인지 의식하지 않고 몰입하게 했다.(34쪽) * 혼자 걷기는 세상 체험에 좋은 도구로 합리화되기도 했다. 존 클레어에게 혼자 걷기는 아름답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구경하고 반응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막히고 삭막한 도심 거리 산책은, 이방인들의 공동체인 19세기 도회지를 파악할 비법이었다. 이것이 도심 산책의 강점이자 한계였다. 도심의 익명성은 늘 매력적이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의 철학》에서 "끝..

정보라, 《저주 토끼》, 아작, 2017.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업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33~34쪽, 「저주 토끼」 중에서) *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녀는 뛰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가느다란 목소리..

김애란 외,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라는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14~15쪽,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 '바다'가 그냥 바다가 되고 '선장'이 그냥 선장이 될 때까지, '믿으라'는 말이 '믿을 만한 말'로, '옳은 말'이 '맞는 말'로 바로 설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15쪽,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아침이슬, 2008.

(뱅쿼) 시간의 씨앗 속을 너희가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떤 낱알이 자라고 어떤 낱알이 안 자랄지 알 수 있다면, 내게 말해 다오, 은총을 구걸하지도 그대들의 증오를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니. (15~16쪽) * (맥베스 부인) 오 결코 태양은 그 내일을 보지 못할걸요 당신 얼굴은, 여보, 무슨 책 같군요, 사람들이 수상한 내용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을 속이려면, 그때그때 어울리는 표정을 지으세요. 환영하는 내색을 담아야죠. 당신 눈에, 당신 손에, 당신 혀에. 순진한 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 밑은 뱀이어야 하고요. (27쪽) * (맥베스 부인) 그렇다면 어떤 짐승이 이 계획을 제게 발설하라고 당신을 꼬드겼나요? 당신이 발설을 해치웠을 때, 그때 당신은 사내였어요. 그리고 당신 이상이 되기 위해, 당신은..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문학동네, 2021.

생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은 하나도 돼주지를 않았으니까. 부모의 사랑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에서는 성적도 좋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는 늘 그런 식이다. 그리고 자라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기웃거리고, 남자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면서 연한 커피를 세 잔이나 마신 다음에 밤의 카페를 나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느 날의 한적한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서 눈앞을 지나간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가 된다.(23~24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 모든 사람이 거의 예외 없이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해서 그러한 봄바람 같고 한여름 날의 폭우 같은 사랑을 가졌었나,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집 떠나기 전날의 나는 확신하였다.(29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난다, 2021.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 깨고 나면 달콤했던 예전의 쓸쓸함이 아니고 쓸쓸함은 이제 내 머릿골 속에서 중력을 갖는다. 쓸쓸함이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뒤켠 죽음의 근처를 응시하는 눈을 갖는다.(13쪽) *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14쪽) * 배고픔만큼 강한 공감을 일으키는 것도 없다.(16쪽) * 그런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그러나 그들의 배고픔만큼이나 요지부동인 예술의 꿈 하나로 자존심을 버티면서, 그들은 몹시도 배고픈 밤이면 시장 뒷골목에서 쥐를 잡아먹고 살았다. 누가 믿겠는가. 서울 거리에서 누군가가 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