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8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2021.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 중에서 * 오늘도 암스테르담엔 노란 햇빛 비치고 플로렌스에선 그리운 꽃들이 피어난다. 언제나 가볼 수 있을까 죽음다운 죽음이 환히 비치는 곳으로 너의 웃음이 시원한 사이다 한 잔으로 쏟아지고 우리의 고질적인 사랑이 영화처럼 쉽게 끝났다가 심심하면 또 영화처럼 쉽게 시작될 수 있는 곳으로. - 중에서 *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 중에서 * 슬퍼하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 그러나 모든 기억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 밤은 오고 나는 나..

페터 한트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아트북스, 2020.

지금 내게 떠오르는 예는 모두 풍경화들이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아름다운 침묵의 공간, 위협이 도사리는 반수면 상태와도 같은 풍경. 특이하게도 그런 그림들은 모두 연작으로 그려졌다.(19~20쪽) * 나는 누군가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리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혼자인 것이 행복했다. 나는 '그 길'을 걸었다. 그늘진 도랑에서 '그 시냇물'을 보았다. 나는 '그 돌다리'에 섰다. 거기 바위의 균열이 있었다. 소나무들이 있었고, 옆길에 줄지어 선 모습이었다. 길의 끝에는 까치 한 마리가 커다란 흑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나무 향기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영원히". 나는 걸음을 멈추고 메모했다. "무엇이 가능한가 - 바로 이 순간에! 세잔의 길에는 침묵."(40~41쪽) * 타인의 ..

한강 “혐오는 숨 쉬는 공기속에…직면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다면 위험”

서울국제도서전에서 4년 만에 대중 앞에 나선 소설가 한강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서로 연결 막연한 낙관 대신 실낱같은 희망을…살아있는 한 빛을 향해가며 싸워야 글 쓰는 것이 나의 할일…다음 작품 집필 중 “혐오는 아주 가까이 있어요. 숨쉬는 공기 속에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요즘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절망할 때도 많아요. 하지만 공기 속에 흐르고 있는 혐오를 직면하고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면 혐오와 절멸은 이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오랜만에 독자들 앞에 섰다. 4일 서울국제도서전이 진행중인 서울 코엑스에서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 만남’을 주제로 강연했다. 장편소설 의 한 구절에서 주인공 경하가 제주 4·3 당..

이혜경 외, 《누구나, 이방인》, 창비, 2013.

그곳은 내 생애 가장 넓고 밝고 높은 방이었다. 그 방에서 보내는 시간을 나는 좋아했다. 정전이 잦은 저녁 어스름에 촛불을 켜놓고 방 안과 방 밖이 같은 밀도의 어둠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는 순간이 좋았다. 아침마다 동쪽 창 아래 놓은 침대에 누워 눈은 뜨지 않고 정신만 뜬 채로 햇빛에 오래 몸을 담그고 있던 순간도 좋았다.(86쪽, 김미월, ) * 몽골에 도착하고 나서 한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계획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경이로운 날들이었다. 나는 하루에 마흔여덟시간을 가진 사람처럼 살았다. 천천히 먹고, 오래 자고, 천천히 생각하고, 이따금 밖..

에두아르 르베, 《자화상》, 은행나무, 2015.

여행의 끝은 소설의 끝과 같은 슬픈 뒷맛을 남긴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일들을 잊어버린다. 나는 누군가를 죽인 누군가와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 나는 막다른 길들을 바라볼 것이다. 나는 삶의 끝에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7쪽) *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다. 나는 잊는 것을 잊지 않는다.(8쪽) * 나는 때로 비열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주위에 있을 때 더 불편하다.(12쪽) * 나는 이름들의 목록을 만들 때 내가 이름들을 잊을까 두렵다.(37쪽) * 나는 내 꿈들이 작업에 유용할 때 더 잘 기억한다. 내용과 상관없이 꿈들을 다시 상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꿈들은 너무도 체험한 일들의 기억처럼 구성되어 있어 때로 나는 실제로 일어..

데이비드 빈센트, 《낭만적 은둔의 역사》, 더퀘스트, 2022.

도보는 사람들을, 특히 북적대는 집을 피할 가장 간단한 수단이었다. 동시에 강렬한 문학적인 경험이기도 했다. 산책자들은 한적한 곳에서 읽을 책을 소지해 다양한 도보 문학에 기여했다. 보행 속도는 자연과 인간이 만든 환경을 숙고하기에 이상적이었다. 한눈 팔지 않고 움직이는 시선은 걷는 곳이 들과 숲인지 도시의 거리인지 의식하지 않고 몰입하게 했다.(34쪽) * 혼자 걷기는 세상 체험에 좋은 도구로 합리화되기도 했다. 존 클레어에게 혼자 걷기는 아름답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구경하고 반응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막히고 삭막한 도심 거리 산책은, 이방인들의 공동체인 19세기 도회지를 파악할 비법이었다. 이것이 도심 산책의 강점이자 한계였다. 도심의 익명성은 늘 매력적이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의 철학》에서 "끝..

정보라, 《저주 토끼》, 아작, 2017.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업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33~34쪽, 「저주 토끼」 중에서) *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녀는 뛰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가느다란 목소리..

김애란 외,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라는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14~15쪽,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 '바다'가 그냥 바다가 되고 '선장'이 그냥 선장이 될 때까지, '믿으라'는 말이 '믿을 만한 말'로, '옳은 말'이 '맞는 말'로 바로 설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15쪽,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