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7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문학동네, 2021.

생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은 하나도 돼주지를 않았으니까. 부모의 사랑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에서는 성적도 좋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는 늘 그런 식이다. 그리고 자라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기웃거리고, 남자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면서 연한 커피를 세 잔이나 마신 다음에 밤의 카페를 나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느 날의 한적한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서 눈앞을 지나간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가 된다.(23~24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 모든 사람이 거의 예외 없이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해서 그러한 봄바람 같고 한여름 날의 폭우 같은 사랑을 가졌었나,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집 떠나기 전날의 나는 확신하였다.(29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난다, 2021.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 깨고 나면 달콤했던 예전의 쓸쓸함이 아니고 쓸쓸함은 이제 내 머릿골 속에서 중력을 갖는다. 쓸쓸함이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뒤켠 죽음의 근처를 응시하는 눈을 갖는다.(13쪽) *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14쪽) * 배고픔만큼 강한 공감을 일으키는 것도 없다.(16쪽) * 그런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그러나 그들의 배고픔만큼이나 요지부동인 예술의 꿈 하나로 자존심을 버티면서, 그들은 몹시도 배고픈 밤이면 시장 뒷골목에서 쥐를 잡아먹고 살았다. 누가 믿겠는가. 서울 거리에서 누군가가 배가 ..

피에르 베르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프란츠, 2021.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11쪽) * 당신을 살아 있게 했던 것,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달려온 불안에서 당신을 구해준 것 역시 다름 아닌 당신의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예술가는 오로지 창작을 통해서만 구원과 희망의 이유를 발견합니다.(14쪽) * 이 편지도, 앞으로 쓸 글들도 네가 읽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아. 그러나 상관없이 써볼 생각이야. 결국 혼잣말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지. 이 편지는 온전히 너를 향한 것, 우리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이자 너에게 말을 거는 나의 방식이니까. 듣지도 답하지도 않을 너에게.(17쪽) * 작년과 똑같은 테이블에 앉아 네 생각밖에 하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슬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달걀과 닭》, 봄날의책, 2019.

우리는 종종 서로를 알아본다. 어떤 특정한 응시의 방식, 악수를 하는 특별한 모습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제 변장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비록 말을 나누지는 않지만 거짓말도 하지 않으며, 비록 진실을 말하지는 않지만 가식으로 꾸밀 필요도 없다. 사랑은, 좀 더 많은 관련이 허락되는 일이다.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한 거대한 환멸이기 때문이다. 환상의 상실을 견뎌낼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에 사랑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자발적으로 사랑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이다. 사랑은 궁극의 가난이다. 사랑은 갖지 못함이다. 게다가 사랑은, 사랑이라고 여겨오던 것에 대한 환멸이다. 사랑은 상이..

멀리

우리는 바다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해서 앞으로 갔다. 바닷가에 차를 세워두고 골목길 안쪽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서 생선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나는 내가 바닷가에서 자랐노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리고 불현듯, 지금은 사라진 공항을 찾지 못해 깊은 밤을 방황하던 두려운 베를린의 11월에 대해서도. “그 공항은 마치…. 감옥처럼 보였어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있는 오래전 여자 친구 이야기를 했다. “35년 동안 나는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그녀를 면회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갔죠. 작년에는 당신이 말한 바로 그 베를린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갔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생의 예감에 내 내면의 빈 방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35년이나 그녀는 감옥에 있었군요! 도..

황정은, 《파씨의 입문》, 창비, 2012.

나는 죽은 뒤에 뭔가 남는다거나, 다시 태어난다는 거 믿지 않아. 왜. 믿고 싶지 않으니까. 어째서. 가혹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뭐가 가혹해. 예를 들어, 네가 죽어서 나한테 붙는다고 해도 나는 모를 거 아냐. 모를까. 모르지 않을까. 사랑으로 알아차려봐. 농담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보는데 내가 너를 볼 수 없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쓸쓸하겠지. 그거 봐. 쓸쓸하다느니, 죽어서도 그런 걸 느껴야 한다면 가혹한게 맞잖아. 나는 이 생에 살면서 겪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내가 죽을 때는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좋겠어. 이왕 죽는 거, 유령으로 남거나 다시 태어나 사는 일 없이,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얘기야. 그건 너무 덧없다고 내가 말하자, 덧없는 편이 낫다,라는 것이 유도 씨의 대답이었다. 죽어서..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며 또한 글을 쓰는 것은?"

2018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작가 수상 소감 오늘 아침에 요가를 마치고 나서, 수상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7월부터 취리히에 머물고 있는데, 내일부터 한 달가량 취리히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 있을 예정이었다. 인터넷이 없는 그 여행 중에 쓰여질 이 짧은 글은, 이곳 취리히에서 시작하여 여행지의 어디에선가 끝날 것이다. 많은 다른 작가들처럼 나도 작가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 그건 번역이다. 창작과 번역은 많이 다르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비슷하여, 어떤 경우 창작은 번역이 되고 번역이 곧 창작이 되기도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략의 규칙이라고 할 만한 습관이 생겼다. 한국의 집에 머물 때는 주로 번역을 하고 외국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내 책을 쓴다는 것이다. 며칠 전 어느 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