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고리 17

나는 꿈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페소아의 시를 읽는다. 나는 지금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이동 중이다. 페소아가 태어난 그곳. 시의 한 구절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린다. ‘나는 꿈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 여행지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생애 첫 유럽 여행이라는 것도, 스페인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포르투갈이라는 나라 때문이었다. 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내게 알 수 없는 위안과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고향이 바로 포르투갈 리스본이었던 것이다. 그런 내 떨림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페소아를 보러 간 자유 여행이 아니었기에 페소아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토성의고리 2023.02.25

우리는 결코 그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없어

“중세시대의 성당을 알아?” “성당?” “하나의 성당이 완성되려면 삼사백 년씩 걸렸던 성당들 말이야. 거기 하나하나 벽돌을 놓던 인부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생애에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했지.” 그는 편지봉투에 성당과 인부를 끄적여 그리면서 말했다. “결국 우리가 그 사람들과 같지 않을까.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고 해도, 결코 그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없어.” -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중에서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바르셀로나까지 무려 열여섯 시간 정도 비행기를 탔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니 밤이었고, 우리들은 곧장 호텔로 가서 잠을 잤다. 스페인에서의 제일 처음 일정은 사라고사에 있는 필라르 대성당을 보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필라르 성당이 있는 사라고사..

토성의고리 2023.02.01

여행의 위험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에서 그렇다면 여행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와 제대로 된 준비라는 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걸까. 여행이란 때론(어쩌면 많은 부분) 즉흥적이지 않은가? 여행을 완벽하게 준비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저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속으로 계속 이런저런 의문을 늘어놓는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문장일터인데 왜 그리 따지고 드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그런 걱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되지..

토성의고리 2023.01.15

내 여행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길을 잃고, 말을 더듬으며, 내성적이며, 불안하고 그리고 불특정하다고

내 여행은, 작가들이 오직 글을 쓰기 위해서 장소를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내가 있는 장소의 이동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내 여행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길을 잃고, 말을 더듬으며, 내성적이며, 불안하고 그리고 불특정 하다고. - 배수아,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중에서 *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다녀왔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나는 꿈과 현실을 좀처럼 구분하지 못했다. 떨어지지 않는 감기기운과 시차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기를 반복했다. 스페인에 도착해서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수시로 깨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는 적응하는 것인지 저항하는 것인지 모를 몸과 마음으로 낯선 이국에서 십여 일을 지냈다. 다녀오니 한 해의 마지막이었고 곧 새해가 시작되었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토성의고리 2023.01.07

미묘에 대하여

* 일본의 나무들, 숲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아 보이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그런. 나는 일본의 도심 풍경도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산과 숲, 나무가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미묘'라는 단어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했다. 미묘하게 다른 사람들, 나무들, 숲들에 대해서. 오래전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느꼈던 '미묘'와는 '미묘'하게 다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 일본의 어느 작은 마을길을 걷고 있는데,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그 순간 내가, 아주 오래된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일본은 자연을 제외하고 모든 것들이 다 작아 보였다. 방의 크기, 화장실과 욕실의 크기, 자동차의 크기, 음식의 양 등. 반면 일본의 자연은 광활하고..

토성의고리 2022.11.27

너의 이름은

오랜만에 울진 성류굴을 다녀왔다. 7월 초에 다녀왔는데 이제야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었다. 아니, 생각의 정리라기보다는 문득 다시 생각났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는 문득 울진의 성류굴이 생각났고, 그래서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고, 사진 속 동굴의 기기묘묘한 형상에 다시 한번 놀랐으며, 오래전 몇 번 다녀왔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며, 그래서 이번이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통상 그러하듯 나는 동굴이 거쳐왔을 오랜 시간들(감히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을 상상하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 가진 유한함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동굴은 시간의 집적이 돌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우리들은 한없이 티끌만 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식상하고도 부..

토성의고리 2022.07.30

타오르는 녹색과 검정의 초상

제주도를 다녀왔다. 이번 여름은 제주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느낌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육중하게 밀려드는 두텁고 습한 공기와 바람이, 그곳이 다름 아닌 제주도임을, 그리고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절절하게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그 습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렇게 하면 이 습하고 더운, 제주도 특유의 날씨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다는 듯이. 처음부터 이번 여행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 내키지 않았다. 거의 반쯤 떠밀려 간 여행인 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라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도 있으련만, 이번에는 어쩐지 그런 마음마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설레지 않는 여행이 있었던가? 나는 떠나기 전부터 피곤할 거라는 생각에 지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내 안의 ..

토성의고리 2022.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