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고리 20

어떤 절실함

*요즘엔 비가 세차게 오는 추운 날씨에 깊은 산속에서 작은 텐트를 치고 자는 사람들의 영상을 자주 찾아본다. 외부의 환경은 암담하고 춥지만 텐트 속 작은 난로와 침낭의 온기로 밤을 지내는 인간이라는 존재. 나는 지금 무언가 절실한 걸까 아님 절실함이 필요한 걸까.   *캠핑하러 가기 며칠 전에 나는 저런 글을 썼다. 캠핑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처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런 흐름을 만든 것일까. 오래전 친구들과 한여름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잔 경험 외에는 캠핑을 거의 하지 않던 내가, 뭘 하든 귀찮아하는 내가 캠핑을 하게 되다니. 그건 사려 깊은 내 사촌 때문이었다. 사촌이 말했다. '그냥 몸만 와. 준비는 내가 다 할게.' 비가 세차게 오지는 않았지만, 밤새 바람이 불고..

토성의고리 2024.11.21

무려 칠백 년이라는 세월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S가 말한 700년 된 은행나무를 보러 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말이 다가오면 오늘은 가야지, 내일은 가볼까 하다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곤 했다. 오늘도 역시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C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저 생각만으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C가 잠깐 들른다는 말에 나는 오늘 오후에 (나와의) 약속 - 계속 유예되기만 했던 - 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먼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C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C와의 일은 굳이 만나지 않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문제였으므로, 조금이나마 생길지도 모를 죄책감은 저만치 밀어놓을 수 있었다.  차를 몰고 외곽도로로 삼십 분 정도 가다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이십 분 정도 ..

토성의고리 2024.11.10

오래된 것들

뜨거운 여름. 문을 지나는데 제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어떠니? 눈으로 물었다. 연수를 마치고 오는 길에 고택이 있어 들른 것이다. 그곳의 주인인듯한 제비에게 인사를 하고 고택을 구경했다. 아직 피어있는 능소화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천천히 고택을 구경하고 있으니 이 여름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모든 것들에 경외심이 들었다. 고택의 기와도, 나무도, 꽃들과 낮은 담들도 모두 뜨거운 태양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인간인 나만이 덥다를 연발하며 그늘만 찾아다니지 않았던가? 나는 왠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 툇마루에 잠시 앉았다.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곳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그늘 또한. 자연과 더불어 고택은 그렇게 오래된 것이 되어간다. 나라는 존재 역시도. 다른 점..

토성의고리 2024.08.03

密陽

감기가 채 낫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장시간 운전을 해야 했다. 매제가 새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는 밀양이 목적지였다. 감기도 감기지만 주말엔 반드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만 하는 내게는 좀 무리인 듯했지만, 아버지와 고모의 부탁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내 동생의 일이기도 하기에 한 번 가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밀양은 오래전 이창동 감독과 전도연, 송강호 주연의 영화 으로 익숙한 지명이었다. 그 영화는 내게 무척 진지하고도 묵직한 감동을 전해주었기에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밀양에 대해서 그 이상의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밀양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한마디로 밀양은 제법 큰 시골 같은 느낌이었다. 도시적인 느낌보다는 시골의 오래된 느낌이 강했는데 마냥 시골..

토성의고리 2024.04.21

건물과 건물을 둘러싼 것들

* 뮤지엄 산에 다녀왔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물 안에서 안도 타다오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제임스 터렐관은 이번에도 보지 못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안도 타다오의 인기가 이렇게? 뭐랄까, 건축가의 전시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전시를 보는 것도 좋았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건물 그 자체였다. 어쩌면 그곳의 주인은 전시관 안에 있는 작품들이 아니라 건물 그 자체, 그러니까 건물을 이루고 있는 돌과 건물을 둘러싼 풍경들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곳에 있던 나무들과 담쟁이넝쿨 같은 것들 말이다. 돌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건물과 수중 정원, 푸른 나무들의 어우러짐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아주 빨리 흘러갔다. 아, 그곳에 가면 잊을 수 없는 것이 하..

토성의고리 2023.05.05

동백은 세 번 핀다고

동백이 지천인 곳에 다녀왔다. 발 디디는 곳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동백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꽃은 거의 진 채였지만. 동백꽃을 이렇게나 많이,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닥에 흐드러지게 떨어진 붉은 꽃을 밟으며 동백나무 숲길을 걷는 일은 특별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경이로움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어떤 비감(悲感)을 두른 것이었다.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해설사는 말했다. 동백은 세 번 핀다고. 처음에는 나무에, 두 번째는 바닥에, 세 번째는 우리들 마음속에. 참으로 적절한 말이 아닌가 생각했다. 바닥에 '핀' 붉은 동백꽃을 밟을 때마다 느껴지던 그 아득한 아찔함에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리. 누군가는 동백꽃을 피꽃이라 했다지. 나는 순간..

토성의고리 2023.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