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고리 20

미묘에 대하여

* 일본의 나무들, 숲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아 보이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그런. 나는 일본의 도심 풍경도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산과 숲, 나무가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미묘'라는 단어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했다. 미묘하게 다른 사람들, 나무들, 숲들에 대해서. 오래전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느꼈던 '미묘'와는 '미묘'하게 다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 일본의 어느 작은 마을길을 걷고 있는데,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그 순간 내가, 아주 오래된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일본은 자연을 제외하고 모든 것들이 다 작아 보였다. 방의 크기, 화장실과 욕실의 크기, 자동차의 크기, 음식의 양 등. 반면 일본의 자연은 광활하고..

토성의고리 2022.11.27

너의 이름은

오랜만에 울진 성류굴을 다녀왔다. 7월 초에 다녀왔는데 이제야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었다. 아니, 생각의 정리라기보다는 문득 다시 생각났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는 문득 울진의 성류굴이 생각났고, 그래서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고, 사진 속 동굴의 기기묘묘한 형상에 다시 한번 놀랐으며, 오래전 몇 번 다녀왔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며, 그래서 이번이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통상 그러하듯 나는 동굴이 거쳐왔을 오랜 시간들(감히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을 상상하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 가진 유한함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동굴은 시간의 집적이 돌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우리들은 한없이 티끌만 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식상하고도 부..

토성의고리 2022.07.30

타오르는 녹색과 검정의 초상

제주도를 다녀왔다. 이번 여름은 제주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느낌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육중하게 밀려드는 두텁고 습한 공기와 바람이, 그곳이 다름 아닌 제주도임을, 그리고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절절하게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그 습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렇게 하면 이 습하고 더운, 제주도 특유의 날씨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다는 듯이. 처음부터 이번 여행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 내키지 않았다. 거의 반쯤 떠밀려 간 여행인 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라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도 있으련만, 이번에는 어쩐지 그런 마음마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설레지 않는 여행이 있었던가? 나는 떠나기 전부터 피곤할 거라는 생각에 지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내 안의 ..

토성의고리 2022.07.03

고요하지만 격렬한

* 그곳에 도착했을 때, 오직 들리는 것은 부는 바람과 저수지 위에 무리지어 있던 오리떼의 울음소리 뿐이었다. 웅웅거리는 바람소리가 주위를 에워싼 산을 지나 저수지를 훑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 나에게 와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거대한 고요였을까?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천천히 이육사 문학관을 향해서 걸었다. 뒤에서 오리떼의 울음소리와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 소리들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매표소 직원에게 그만 '이곳은 정말 조용한 곳이로군요!' 라는 말을 무심결에 하고 말았다. 직원은 웃으며 '이곳은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니까요.' 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고요하다는 말인가? 그가 이렇듯 고요한 곳에서 태..

토성의고리 2020.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