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정약용

시월의숲 2005. 2. 13. 14:48

정약용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흔히 떠오르는 것은 그가 조선후기 중농주의 실학자였다는 것, 그가 주장한 여전론에서 지금의 사회주의 사상을 연상할 수 있다는 것, 대표적인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기예론', '탕론' 같은 것이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당시 그는 굉장히 획기적이고 혁명적이기까지 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주장했던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사회에는 반영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에서 한계점이 느껴진다. 그는 유배되었으며 유배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폐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폐족이란 그는 물론 그의 자손들까지도 벼슬길이 막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 그가 아무리 뛰어난 사상을 가지고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것이 그의 개인적이고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의 사상이 현대에 와서 크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보면 기존의 사회(불합리한 면)를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상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란 것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이 폐족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인식했다. 그런 인식은 그를 폐배적이거나 비관적으로 만들기 보다 오히려 더욱 의연한 정신으로 생활하게 만든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보여지는 자식들에 대한 엄함과 자상함, 학문에 대한 주관, 뚜렷한 자기 신념 등을 보면 그것이 느껴진다. 그는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이 서간집을 보면 그가 책을 만들 때 얼마나 꼼꼼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중 '학연에게 부치노라1'이라는 편지를 보면 그의 시에 대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이 편지는 1808년 봄에 그의 유배지였던 강진읍에서 다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둘째아들 학유가 와서 공부하기 시작한 무렵에 첫째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는 큰아들에게 직접 학문을 가르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해서 학문하는 방법을 세세히 적어보냈는데 그 중 시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시란 나라를 걱정해야 하며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인용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나에게 적잖은 거부감과 시대적 거리감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뭐랄까, 상당히 고리타분하게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개혁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강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이 결코 고리타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편지는 학문적으로 탐구한 글이 아니다. 자신의 내밀한 생각과 감정을 보다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래서 보다 섬세하고 감성적일 수 있다. 하지만 정약용의 편지들은 상당히 교화적인 면이 많았다. 그래서 읽기에 조금 딱딱했던 것이 사실이다(그것은 마치 그 옛날 훈장님께 가르침을 받는 아이가 느낀 감정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그것이 자신의 두 아들들에게, 둘째형님에게, 제자들에게 하는, 당부의 성격이 강한 글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깐깐한 선비정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폐족임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사상이나 저서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땅에 묻히게 될까봐 우려한다. 그리고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은, 나쁘게 보면 세속의 권위와 명예에 집착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그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지금 자신의 처지와 현실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분개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불합리한 면이 뻔히 보이는 데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오는 안타까움이 아닐까? 그런 그의 저서와 사상이 200년이라는 세월을 뚫고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어떤 기분이 들까?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졌다고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출까?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당시의 불합리의 근본뿌리가 아직도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심히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는 '목민심서'에서 '목'이란 '민'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한 나라의 왕이라도 백성들이 있어야 하고 그들이 우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이 나라를, 백성을 걱정했다.

나는 투철한 혁명가도 아니요, 명석한 과학자도 아니요, 통찰력있는 철학자도 아니다. 나는 다만 정약용이 그렇게도 잘 살기를 바랬던 '농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나랏일에 무관심했던 나를 돌아본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모든 사람들이 열혈한 정치운동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누리는 자유라는 것도 국가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