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살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랑합니다.(김주희, '피터팬 죽이기')

시월의숲 2005. 2. 13. 14:49
이 책은 지난 7월달에 산 책이다. 지독히도 더운 날, 나는 서점에 들어가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피터팬 죽이기'...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소설은 쉽게 말해 피터팬이 후크선장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과 그러한 현실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젊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피터팬은 후크 선장이 되어야만 한다. 현실에서 피터팬은 영원히 피터팬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다들 알고 있듯이 피터팬은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이다. 우리는 모두 피터팬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난 지금도 피터팬이라고 느끼지만(이건 분명 문제가 있다). 만약 현실에서 피터팬으로 계속 남아있으려 한다면? 결과는 자살이나, 타살 두 가지 중 하나다.

주인공인 '나'(김예규)는 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으로써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무언가 뚜렷한 비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대학을 졸업하고 방황하다가 선배 정우의 충고로 대학원을 들어가게 된다. 그의 주변에는 몇 안되는 친구들이 있는데 만화가를 지망하는 영길이, 항상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오바맨 승태, 강아지를 좋아하고 현실적인 피테쿠스(별명임) 등이 있다. 그의 나이는 스물 일곱. 소설은 스물 일곱살 난 주인공의 스무살 무렵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내면적이고 고백적인 회상형식으로 드러낸다.

두 번째 애인이 떠나가고 남겨진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있던 '나'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조정자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조정자는 소설가이고 자신은 그 소설가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인물이며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은 가상공간일뿐이라는 것이다. 그 소설의 제목은 '두더지'. 이것은 두 번재 애인이 떠나가고 사라졌던 승태가 돌아오면서 꿈 속에서만 살고 있던 '내'가 서서히 그것이 꿈이었음을, 현실은 엄연히 꿈 꾸기를 포기해야만 함을 자각하는 것과 같다. 두 번째 애인이 떠나간 이유는 현실적이지 못한 자신의 삶을 불안해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냉정하다. 감정만으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치열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평생 이해해주고 사랑할 사람만 가지고는 살아가지 못한다. 집안에서 시체놀이만 하는 사람은 결국 산송장 밖에 되지 못한다. 조정자는 '나'에게 의지되로 되는 건 없다고 속삭인다. 모든것이 전지전능한 조정자의 손에 달려있다고.

하지만 작가는 그것 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항상 공모전에서 떨어진 영길이의 만화가 군대 가기전 마지막으로 내본 공모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떨어졌지만 심사위원들은 그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다. 조정자의 뜻대로라면 영길이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그런 평가조차 받지 못했어야 하는데... '나'는 현실에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는 애초에 '소설 두더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음도 깨닫는다. 모든 것이 실제 상황인 것이다. 탯줄은 잘려나갔다. 그는 누군가의 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 후크선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젊음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젊음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는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그가 젊다는 증거이자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된다. '꿈과 현실의 날카로운 면도날' 위에 젊은이들은 서 있다. 자칫하면 상처받는 사람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 작가는 아마도 그러한 젊음의 이상함과 특유의 무기력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바로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에 있으므로. 나 또한 피터팬을 죽이지 못한 외롬족이어서 그런지 주인공의 생각에 깊은 공감이 갔다.

현실에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한 가지라도 있는 것일까, 아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짓일까. 언젠가는 피터팬으로부터 벗어날 수 밖에 없다. 이십대는 그것을 자각하는 나이가 아닐런지. 이십대는 정말 아픈 나이이다. 아니, 아픔 그 자체이다.


인상적이었던 구절.

" ...... 혼자 자취방에 누워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 줄 알아? 외로움이 발바닥에 자리 잡는 거야. 외로움은 점차 위로 올라와. 외로움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기침이 나오고 눈까지 올라오면 눈물이 나오지.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면 죽는 거야. 외로움이 수류탄으로 변해서 내 몸을 폭파하니까. 아무래도 나는 외롬족인 것 같아."

"살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