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언제나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어디로 가야한다는 목적없이 그냥 떠나고 싶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나 나를 이 곳 아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마음으로만 끝난다면(언제나 그렇지만) 그저 앉아있을 수 밖에 없게 하기도 한다. 멍하게. 아마도 이런 마음은 누구나 가지는 것이리라. 일상에 지쳐 내가 내 존재를 자각하지 못할 때, 문득 내가 누구인가하는 생각이 들때, 그럴 땐 진정 여행을 떠나야 하리라. 여행의 목적지에 내가 찾던 것이 있을지 없을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행이란, 모든 현상들이 그렇듯,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과 떠나려는 그 과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 여행은 떠남,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되는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요즘엔 책을 보다보면 유난히 여행에세이가 눈에 들어온다. 단순히 어디에 무슨 장소가 유명하고, 무슨 음식점이 맛있으며, 교통비는 얼마나 들고... 하는 따위의 여행 안내서가 아니라 작가의 감상이 어우러진 여행에세이. 특히 소설가나 시인들의 여행에세이는 그들 특유의 감성과 문체가 여행지의 풍경과 어우러저 독특한 질감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같은 풍경이라도 그들의 감성에 걸려지면 전혀 새로운 장소가 된다고 해야하나...
그런 내게 '최영미의 유럽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시대의 우울'은 무척이나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 이유는 이 책을 딱히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딱히 여행에세이라고도 할 수 없고, 단순히 미술감상책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마냥 일기라고 하기에도 무언가 석연찮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책. 하긴 시인의 주된 여행목적이 주로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명화를 감상하는데 있었으니까 그럴만도 하다. 그러한 경계에 서 있는 책이어서일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그림 보는 것도 좋아하고, 여행에 대한 동경도 가지고 있는 내게 이 책은 정말이지 딱 맞춘 양복처럼 편안히 내 속에 스며들었다. 특히 최영미 시인이 감명받았다고 하는 렘브란트의 자화상들... 유럽 각지의 미술관에 하나씩은 있는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을 보며 시인은 캔버스를 너머의 자신을 들여다 본다. 누구보다 자의식이 강했던 화가, 강렬한 명암의 대비로 양면적 삶 속의 자신을 집요하게 들여다본 화가 렘브란트의 모습에서 언듯 최영미 시인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한 집요함이랄까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녀 역시 렘브란트에 결코 뒤지지 않을테니까. 어쩌면 애초에 그녀는 도판에서만 보던 렘브란트에 이끌려 그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여행이든지 여행의 목적은 결국 자신과의 만남이 아닐까. 잊어버리고 있던 자기 자신과의 만남. 그것을 위해 우리는 머나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비행기에, 기차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여코 여행을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본성 속에 어쩔 수 없는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인생이란 떠남과 돌아옴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니까.
인상적이었던 구절,
" 이 여행이 끝나면 나 또한 저 시끌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그러나 지저분한 건 오히려 삶인지도 모른다. 삶은 때론 우리를 속일지라도 생활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거의 없다. 그것은 때맞춰 먹여주고 문지르고 닦아주기만 하면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일상은 위대하다.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일상은 아무리 귀찮아도 버릴 수 없는 여행가방과 같은 것. 여행을 계속하려면 가방을 버려선 안 되듯, 삶은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로 나날이 새로 채워져야 한다.
그 뻐근한 일상의 무게가 없으면 삶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영원히 허공을 떠돌 것이다.(14쪽)"
" 기차를 타고 미지의 도시에 다가갈 때의 느낌은 서투른 연애의 매커니즘과 비슷한 데가 있다. 우리가 어느 한 장소의 혹은 한 사람의 본질을 가장 잘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속에 머물 때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다가갈 때, 혹은 그것을 떠날 때인지도 모른다.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경험할 것인가, 아니면 환멸을 맛볼 것인가는 어느정도 변덕스런 날씨나 그때그때 당신의 컨디션과 같은 우연의 폭력에 의해 좌우된다.(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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