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무엇이 되어

시월의숲 2005. 3. 20. 14:52
꼭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어제 오랜만에 군대 후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문창과에 다니는 그는 그 시절, 군생활을 하면서 무뎌질 수 있었던 내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해주는 영감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쓴 시와 그가 들려준 음악들(그는 기타를 아주 잘 쳤다). 사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삭막한 철책 안에서 책과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 할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전화를 한 것이다. 물론 내가 먼저 전화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 최대의 단점은 그것이다. 사람을 대함에 있서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제대를 하고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올해 복학을 했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가 나에게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시험이나 잘 쳤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곤 이내 "너는?" 하고 되물었다. 그는 글을 써서 등단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나는 작가 친구를 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라고 말했다. 그 후 몇 분 더 통화하다가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뚜,뚜,뚜... 전화란 어쩌면 허깨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는 그가 속한 세계에서, 나는 내가 속한 세계에서 다시 살아갈 것이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그가 한 말이 귓가에 생생히 울렸다.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나는. 아니, 꼭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갑자기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첫장면이었던가. 젊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열심히 뛰고 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에 쫓기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주인공은 말한다. 우리들은 항상 무언가 선택을 하면서 산다고. 세상은 선택을 강요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겠다... 그것을 과연 선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왠지 그 말에는 사람을 흔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나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왜 그 장면이 생각났을까.

생각해 보면 나에게 펼쳐진 길은 늘 한 갈래였던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나 미련을 갖지만, 내가 걸어온 길은 그런 류의 감정조차 가질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 같아 화가 난다. 길 자체가 외길이었으며 다른 길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갈래 길을 걸었다고 해서 내가 무슨 고명한 학자처럼 한가지 학문의 길만을 걸었다거나 하는, 뭐 그런 류의 의미는 아니다. 다만 내게 주어진 상황이 나에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길로 몰아부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런 한심한 생각들... 이젠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하지만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물음들.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꼭 무엇이 되어야만 하나.

그 무엇이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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