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고

시월의숲 2005. 6. 25. 18:39

자유.

 

그것은 음악과도 많이 닮아 있다. 아니, 어쩌면 그 두 단어는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녀의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만큼은 자유는 곧 음악이었고 음악은 곧 자유, 그 자체였다. 음악적 자유, 혹은 자유로운 음악. 하나의 빗방울이 다른 빗방울 위에 겹쳐져 이루어진 화음이 그 개개의 영역을 지나 하늘 아래 끝없이 확장된 세계. 그것은 언어가 필요없는, 언어를 뛰어넘는 세계였다. 오로지 글을 쓰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만이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절대정신의 세계. 그녀는 그런 세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소설에서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기존에 자신이 써왔던 관습화된 이야기 중심의 소설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형식, 즉 형식에 있어서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소설이라는 이름하에 쓰되, 그 소설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소설 자체에 대한, 혹은 독자에 대한 반역일 수 있다. 소설로서 소설을 반역하는 것. 혹은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 이것은 이미 진부할 대로 진부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말해지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한 모습일지 모른다.

 

어찌되었든 그녀의,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그것이 반역이든 무엇이든 간에 나에게는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바나』나 『동물원 킨트』에서 보여 주었던 그녀만의 독특한 사유가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오면서 더욱 명징하게 정리된 듯 보였다. 탈주의 욕망이나 고립에 대해 이야기 하던 그녀가 이번에는 음악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아니, 그 모든 것들이 다 녹아들어 있긴 하지만.

 

줄거리는 단순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화자인 내가 독일에 가서 만난 독일어 교사 M과의 사랑 이야기다. 첫 번째 독일어 교사였던 친구 요아힘과 크리스마스를 보낸 일, 요아힘의 권유로 M을 만난 일, 다시 M의 권유로 다른 독일어 교사인 에리히를 만난 일, M과 에리히가 단순히 육체적 호기심 때문에 잠자리를 같이 했었다는 고백을 듣고 수치심을 느끼는 나, 그 때문에 M과 헤어진 일 등이 회상 형식으로 서술된다. 그 사이사이 음악이나 책(쇼스타코비치나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음악가들과 야콥 하인 같은 독일작가들, 혹은 『책 읽어주는 남자』같은 책들)에 대한 개인적 감상 등이 서술되어 있다.

 

M으로 대변되는, 화자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그, 혹은 그녀의 정체(소설에서 화자는 M의 성별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지 않는다. 나중에 에리히와의 관계에서 M이 여자였음이 드러날 뿐, 그것이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M을 상당히 중성적이라고만 묘사할 뿐이다. 그리고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M은, 끝까지 이름이 아닌 M으로만 지칭된다.)는 무엇일까. Music의 첫 글자로 생각되는 M은 실제로 음악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녀가 지향하는 예술적 경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어쩌면 그녀는 음악적인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그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혹은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소설 속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독히 건조하고 사변적이며 지극히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 소설은, 무언가 색다른 것을 찾는 내 허기진 감성을 자극시켜 주었다. 건조하기 이를 때 없는 문체였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러한 건조함이 내안의 더운 습기를 조금이나마 말려주는 듯 느껴졌다. 또한 딱딱하고 까칠까칠하면서도 묘한 맛이 나는 빵을 씹고 있는 듯도 했다. 그 빵을 야금야금 씹는 맛, 그리 나쁘지 않았다. 때론 너무 딱딱해서 잘 넘어가지 않기도 했지만.

 

어쩌면 나는 나만의 논리와 사유를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가 그녀만의 사유를 가지고 매력적인 형상을 만들어 냈듯, 나도 나만의 빵맛을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녀의 소설에 끌리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자유롭고 싶은 내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고.

 

 

 

 

 

<인상적이었던 구절... >

 

 

“사랑은 쉽게 부정되고 그 정의는 항상 애매모호함 속에 갇혀 있고 천박하고 상스러우며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우며 변명을 좋아하고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끈질기게 발언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양새를 망가뜨리고 히죽거리고 킬킬거리고 새끼 밴 암컷보다 더 배타적이며 게다가 그 장황한 목소리가 부끄럽게도 한창때의 장미꽃보다 더 빠르게 잊혀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나간 다음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었다.”(본문 113쪽)

 

 

  “나는 소설쓰기를 원했으나, 그것이 단지 소설의 형태로만 나타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혹은 처음에는 그 기간 동안 내가 읽고 들은 몇 권의 책과 소소한 음악에 관해서 짧고 단조로운 에세이를 쓰고 싶었으나, 그러기 위해서 소설의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그리고 글을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유로운 글이란 그 형태로나 내용으로나 이미 규정되어 있는 어느 폐쇄된 영역 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가능하다면 다른 것을 쓰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197쪽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