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시월의숲 2005. 12. 3. 12:01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라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는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 *

 

 

어제 집에 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백석의 시집을 샀다.

딱히 무슨 책을 사기 위해 서점을 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버스 시간이 남았길래 시간도 떼울겸 모처럼 책구경도 할겸 간 것이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게 일상이 되어서 서점에 가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점이 가진 고유의 매력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벽면 가득 빼곡히 책들이 꼽혀있고, 책을 고르는 사람들의 진지한 눈빛과 차분한 몸짓이 있고, 무엇보다 책 고유의 냄새가 있는 서점의 매력을 인터넷 서점과 감히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서점을 나는 너무나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아 서점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문득 삶이 편해지는 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 저런 책들을 구경하던 중 문득 백석의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시중에 나와있는 백석의 시집 중에 가장 최근의 것으로 생각되는 시집이었다. 편집도 깔끔했고 현대문법에 맞춰 시어를 대폭 수정한 점도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백석 시의 고유한 어감까지 떨어뜨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평소에도 가지고 싶었던 시집이라 망설임 없이 돈을 지불하고 서점을 나왔다. 그때, 백석의 시집을 사들고 나오는 내 마음이 얼마나 포근하던지! 백석의 토속적이고 정감있으면서도 쓸쓸한 언어들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 같아서 왠지 가슴이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백석의 시집을 펼쳤다. 시집의 표제작이자 맨앞에 실려있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는다. 백석의 시 중에서는 좀 색다른 느낌을 주는 시이다. 이국적이라고 해야하나. 어쨌거나 시인은 지금 나타샤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눈이 내리기 때문에 나타샤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나타샤를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내린다고 말한다. 이 미묘하고도 엄청난 그리움의 차이라니! 그렇게 하얀 눈이 내리는 날, 흰 당나귀를 타고 나타샤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에 살고자 하는 시인(여기서는 백석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아마도 흰색은 그에게 있어 순수하고 높은 정신적 지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는 문장에서는 시대의 저항정신도 읽을 수 있고. 아니, 아니다. 그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시대와 결부시켜 따져볼 것이 아니라 그저 쓸쓸하고 아름다운 겨울밤 풍경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소주를 들이키고 있는 한 사람을 그려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너무나 쓸쓸해서 아름다운 풍경. 눈이 푹푹 나리는 날 흰 당나귀를 타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어찌 백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