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훌》중에서

시월의숲 2007. 5. 15. 11:28

아무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과거의 어느 사소한 순간이 생각날 때가 있다. 과거는 주로 미래의 한순간과 강하게 연결되는데, 예를 들자면 죽음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과거의 어느 한 장면이 자연스럽게, 그러나 아주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듯이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모습을 드러낸 과거의 사건은 이미 망각되어버린 것이거나 혹은 너무나 사소하고 무의미해서 미래의 어떤 순간과는 전혀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듯이 보인다. 그 과거의 사건들은 인생의 비밀을 미리 알려주는 암시였을까. 그것이 암시였기 때문에 어느 날 우리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무심코 갈망한 우연이기 때문에 미래의 어느 날 그것은 암시가 되는 것이리라.

 

 

 

*

 

 

 

수미에게는 자신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타인이었으나 나는 바로 나 자신이 타인일지도 모름을 의심했다. 나는 어디에서나 진심을 말하면 그것이 곧 하찮은 소문이 되어 떠돌 것을 의심했다. 사람의 진심이란 곧 하찮은 소문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하찮은 소문을 위해서, 반드시 진심이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순간에 내가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서 뭔가 해명한다면, 그것은 곧 세계의 실체를 이루는 거대한 소문의 일부가 되어 결코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빠르게 사라져갈 것이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

 

 

 

우리는 정녕 타인과 손을 잡고 인사를 했으며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과 가족을 이루고 혹은 그들과 이별한 것인가. 설사 그 모든 것이 소문이 아닌 사실이었다고 해도 타인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그들은 아파도 울지 않고 총알이 뚫고 지나가도 피가 흐르지 않으며 공중에서 폭탄을 맞아도 진정으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공기처럼 흘러다니며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 혹은 그들이 피 흘리고 울부짖고 만원 지하철에서 바로 곁에 선 한여름 돼지처럼 땀을 흘리며 냄새를 풍기는 실제적인 존재라고 해도,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본 것이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이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타인이 정녕 애증의 대상이기나 할 것일까. 타인은 회색빛 옷을 입고 기묘한 모습으로 식탁 곁에 서 있으며 명령을 기다리고 주문을 받아적은 다음 음식을 날라온 것이다.

 

 

- 단편 <회색時> 중에서

 

 

 

처음에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삶은 줄거리가 없는 소설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것은 운명적 결핍이라기보다는 자의적 생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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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퍽 오랜 시간 동안 친구로 지내왔지만 당장 내일부터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해도 오늘밤의 작별인사에 뭔가 다른 덧붙임의 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하는 감정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그런 종류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무적이라거나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만나면 따뜻한 차를 권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돕고 싶어하고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명분이나 원칙이나 가톨릭 교회와 같은 단어를 싫어하고 예술이나 스타일이나 무국적 등의 단어를 좋아했다.(215쪽)

 

 

 

- 단편 <집돼지 사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