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파트릭 모디아노,《슬픈 빌라》중에서

시월의숲 2007. 5. 25. 12:06

세월이 이 모든 것을 여러 가지 다른 색깔로 뒤섞여 있는 안개 같기도 하고 수증기 같기도 한 것으로 뒤덮고 말았다. 때로는 희끄무레한 초록빛, 때로는 약간 분홍빛이 나는 푸른색으로 그 추억들은 채색되어 있다. 수증기……아니다. 차라리 모든 소리를 감싸 들리지 않게 하고 도저히 찢어버릴 수 없는 투명한 장막 같은 것이어서 나는 그것으로 가려진 이본느와 맹트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행여나 그 장막으로 해서 그들의 실루엣마저 사라져버리고 이제 그들에 대한 추억의 한 조각마저도 잃어버리게 될까봐 조바심이 난다…….

 

 

*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해 방임하는 나의 태도는 사실은, 움직임에 대한 공포, 흘러 사라져버릴까봐, 바뀌어버릴까봐,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한쪽이 벌써 무너져내리고 있는 불안한 모래 위를 더 이상 걷지 않으려는, 어딘가에 나를 정착시키고 돌처럼 굳게 뿌리를 내려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

 

 

한 인간의 사라짐에 우리가 가슴 저려 하는 것은 사실 그와 우리 사이를 채우며 존재해 있던 암호들 때문이며, 그의 사라짐과 함께 갑자기 그 암호들도 아무 쓸모 없고 텅비어버리게 되는 까닭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