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시월의숲 2008. 4. 18. 18:42

내가 처음 본 사람에게서 자주 듣는 말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사람을 전혀 본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처음 만났으니까.

 

하지만 자꾸 그런 말을 들으니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우리가 어느 길목 혹은 어느 공간에서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찬찬히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 그래,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도 같아. 혹시...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말. 낯이 익다는 말. 그런 말은 순수한 의미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말임에 틀림없다. 비슷한 연령의 남녀간이라면 어떤 운명의 끈 같은 것을 감지할 수도 있는 말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없이 스쳐지나가는 얼굴들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분위기에 불과할지라도,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무언가를 느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골목길이나 초가집, 나무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어디선가 본 듯한 골목길, 보고 있으면 아련해지는 초가집과 그 옆의 벚나무, 먼지만 풀풀 날리는 어느 시골의 낡은 버스 승강장과 몇가지 제품밖에 없는 코딱지 만한 구멍가게 같은 것들. 논과 밭과 이름 모를 꽃들과 그것들을 끼고 구불구불 나있는 흙길들. 그런 풍경들도 나는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어느 순간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와 그 존재를 슬며시 각인시켜놓는 풍경들을 볼 때마다 나도 그런 풍경들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 풍경들처럼 나도 그 사람들과 그 풍경들에게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낯익음과 그것에서 피어오르는 아련함 같은 것들이다. 그리하여 나는 믿는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그것을 처음 본 순간 낯익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고. 과거에 우리는 만났었고, 만약 만나지 않았더라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고. 스쳐지나갔지만 나는 당신을, 이 공간을 마음에 각인시켜 놓았었다고.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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