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결핍

시월의숲 2008. 4. 26. 22:24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들고 집을 나왔다. 책을 반납하고 마트에 가서 일주일치의 식료품을 샀다. 별로 산 것도 없는데 삼만 원 정도가 나왔다. 꽤 무거운 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였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거리엔 사람들도, 차도 없었다.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하늘이 잔뜩 흐리고 바람이 제법 거세게 옷깃을 파고 들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었다. 오른손에 든 봉지를 왼손으로 바꿔 든 후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무심코 오른손 바닥을 들여다보았는데, 붉은 선이 가로로 두 줄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손을 입에다 가져다 대고 호, 불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낮고 깊게 가라앉은 날씨 때문이었을까, 텅 빈 거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생기를 흡수해 버린 듯한 회색빛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양 손에 새겨진 붉은 선 때문이었을까? 마트에 갔다 오는 길, 텅 빈 거리 한가운데서 불현듯 '결핍'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때때로 어떤 특정한 단어가 엄청난 무게감을 가지고 불현듯 나를 짓누를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 하지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모를 때의 답답함과 알 수 없는 슬픔. 그 순간 나는, 배수아의 말처럼,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시간을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랐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어딘가 결여된 듯한 내 삶과 내 시간에게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이미 무의미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슨 의미를 더 찾으려고 하는 것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때로 생각한다. 나는 누구의 자식도, 손자도, 오빠도, 친구도 아니다. 삶이 완벽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는 결핍, 그 자체가 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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