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별 거 아닌 이야기

시월의숲 2008. 5. 1. 18:47

아이스크림

 

더운 날이다. 퇴근 길, 버스 정류장 앞 수퍼마켓에서 버스표와 아이스크림을 샀다. 봉지를 벗기고 오렌지빛 몸통을 드러낸 아이스크림을 혀로 날름거리며 빨아먹기도 하고, 앞니로 조금씩 깨물어 먹기도 한다. 입안가득 상큼하고 시원한 오렌지 맛이 번진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지겹지만은 않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촌동네 특유의 고요하고, 탁 트인 풍경이 시야로 들어온다. 키낮은 산들이 저 멀리 은은하고 다양한 녹색빛을 발하며 묵묵히 앉아있다. 주위엔 온통 연둣빛 잎사귀를 내민 나무들과 넓은 논들이 오월의 바람과 햇살 아래 몸을 맏기고 있다. 봄! 손에 든 아이스크림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나는 그것이 몹시도 안타깝다. 빨아먹자니 금방 녹을듯하고 깨물어먹자니 금방 사라질듯해서. 봄도 이와 같지 않은가! 그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처럼 음미할 틈도 주지않고 금새 사라져버린다. 고작 오월의 첫날일 뿐인데!

 

 

 

깁스

 

집으로 오면서 팔에 깁스를 한 사람을 두 명이나 보았다. 한 명은 타지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처럼 바퀴달린 여행가방을 끌고 있었고, 또 한 명은 논에서 일을 하다가 나왔는지 흙이 덕지덕지 묻은 옷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있었다. 팔에 깁스를 하고 어떻게 논일을 할 수 있을지 의아했지만 그래도 손놓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촌에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으니. 깁스를 한 사람을 연달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얀 붕대를 둘둘감은 팔. 부자유스러운 움직임. 하지만 딱딱한 깁스 안에 갇힌 팔은 스스로 낫고 있는 중일 것이다. 나는 가끔 마음이 붕붕뜨거나 신경질적이되고 갑자기 화가 난다. 나도 깁스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이해

 

이해를 하고 싶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 그와 이야기하는 할 바에야 벽에다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느낄만큼. 오늘 그런 사람 때문에 좀 화가 났다. 뭐, 직적접으로 나와 관계된 일도 아니고, 내가 나서서 뭐라 할 입장도 아니었기에 가만히 있었지만, 그래도 옆에서 보는 동안 계속 화가 치밀었다. 무엇보다 화가 났던 건 상대방을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아니, 아직도 그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니! 싫으면 안보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이기에 한동안은 싫어도 싫은 내색 못하고 억지웃음을 입에 붙이고 다녀야 한다. 아, 생각만해도 피곤하다.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쩌면 아집으로 똘똘 뭉쳐진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실망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이 씁쓸한 일이다. 이해란 실로 오해의 다른 이름일 뿐만 아니라 '이해못함' 아니 '이해불가능'의 다른 이름인 것만 같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가 옳다고 하면서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이봐요, 아저씨, 그건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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