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주정쟁이의 진정한 주정

시월의숲 2008. 5. 15. 18:28

그, 혹은 그들은 말한다.

 

술을 마실 줄 알아야 인생을 논할 수 있다고. 그들은 술을 마시며 하는 이야기 속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이맛살을 찌푸리며 서로 이야기도 해보기 전에 '좀생이' 혹은 답답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술도 못 마셔서야 무슨 이야기가 되겠어, 라며 그들은 일갈한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 대한 그들의 은근한 힐난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디서 그런 얼토당토 않는 말을! 그렇다면 반대로 말해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는가? 혹은 술을 조금 마시는 사람은 인생을 조금만 논할 수 있고, 많이 마시는 사람은 인생을 아주 많이 논할 수 있는가?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스꽝스럽고, 그래서 콧방귀가 저절로 나오는 얄팍하기 짝이 없는 그런 말이. 나에게 그 말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독한 알코올중독자의 나태하고 진부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려 술의 진정한 맛과 기능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 역시 나에게는 우스운 말일 뿐이다. 술은 긴장을 풀어주고 잠시 기분을 좋게 해줄 뿐, 그것이 인생에 관한 비밀과 모순을 다 알게 해주는 것도, 그것에 다가가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또한 술이 있어야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술은 인생의 모순을 풀어주는 열쇠도, 아픔을 치유해주는 명약도 아니다. 나에게 있어 술은 나약한 자가 느끼는 일시적 환각,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은 자신이 많이 나약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한순간의 쾌락에 빠진 사람들이 논하는 인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나누었던 말들은 술이 깨고 나면 흩어진 낙엽보다도 못한 것이 된다. 술은 그냥 마시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인생이니 뭐니 거창한 말로 그것을 포장하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주정쟁이’의 ‘주정’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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