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거리두기

시월의숲 2008. 6. 19. 18:25

가끔 사진 속 내 모습을 볼 때 나는 당황한다. 이게 내 모습이란 말인가? 사진 속의 나는 거울을 통해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굉장히 어색하거나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다. 때론 전혀 어울리지 않게 손가락으로 승리의 포즈까지 취하면서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싫어서일까? 나는 사진 찍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 속의 나는 내가 아닌 것만 같다. 그것은 나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 별개의 인격을 지닌 타인인 것만 같다. 내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라고 하기엔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낯선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피사체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사람들이 어딜 가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비웃거나 유치하게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그것이 내게는 상당히 기묘하고 신기하게 느껴질 뿐이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그 당당함! 그들도 그들이 찍은 사진 속의 제 모습을 보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까? 그들은 그 차이를 기꺼이 즐기는 것인가? 혹 그것은 내 미숙함에서 오는 감정일 뿐인가? 내 모습에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물론 나는 내 모습에 그리 자신 있어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내 모습을 증오하며 냉소와 체념어린 말만 내뱉을 정도로 자기 모멸감으로 가득 찬 인간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신감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나는 때로 생각한다. 내가 나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내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고. 내가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쩌면 치졸하고 이기적인 자의식에서 나온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아마 이런 내 성향 때문이 아닐까? 소설을 쓰려면 적어도 주인공에게 나를 온전히 던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설은 자서전이 아니므로, 나는 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아니, 내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시치미를 잘 뗄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 지루하고 너절한 감상으로 가득 차 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나를, '나'라는 테두리 밖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카메라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야 한다. 그것은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들에 대해 쓸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들에게서 나를 들여다봤으며, 내 식으로 그들을 해석했다. 그것이 내 소설의 치명적인 결함임을 인정한다. 그들은 '나'라는 좁은 자의식의 테두리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아픈 척, 고결한 척, 외로운 척, 고독한 척 온갖 내숭이란 내숭은 다 떨었던 것이다. 저 다양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몸소 겪지 않은 채.

 

이제부터 나는 나를 분리시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왜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제3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는 좀 더 깊고 넓은 숨을 쉬고 싶다. 보이지 않는 공기를 내 몸 속 저 깊은 곳까지 빨아들여 샅샅이 나를 해부하고 싶다. 내가 무엇이든, 어떤 결론이 나든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부터 사진 찍을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카메라의 시선에 나를 맡길 것임을 다짐한다. 내가 나를 어색해하지 않을 때까지. 혹은 내 그러한 어색함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을 때까지. 혹은 내가 나를 완전한 타인으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그런 다음에서야 나는 진정 한 줄의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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