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삶의 한가운데

시월의숲 2008. 6. 22. 16:20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계절이 왔다. 가만 있어도 더운 숨이 푹푹 쉬어지고, 조금만 움직여도 겨드랑이에 불쾌한 땀이 차이고, 머리가 둔해지고, 모든 일에 무기력해지는 여름! 며칠 전 시작된 장마로 집안은 퀴퀴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차 있고, 아침에 널어놓은 빨래는 마르지 않고, 벽지는 새어나온 빗물로 울울거린다. 칙칙하고 어딘가 썩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벽을 타고 내려온 시커먼 곰팡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겨우 다 읽었다. 처음엔 무척 흥미롭게 책에 집중 할 수 있었는데, 날이 더워지니 집중이 잘 안되었다. 몇 날 며칠을 읽다 말다를 반복하여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은 좋았다. 무척이나 매력적인 주인공, 니나 부슈만 덕택에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여름의 불볕같은 열정과 겨울의 얼음같은 냉정함을 동시에 가진, 자유의 표상같은 상징적인 존재였다. 옳은 신념과 그것을 향해 나가가는 거침없는 저돌성과 자유에의 순수한 열정. 그녀에게 이 죽음과도 같은(엄청난 엄살이다!) 더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더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내 마음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느끼는 것, 내가 행동하는 것, 내 속에서 나온 모든 것들. 더위는 한갖 핑계일 뿐이다. 지극히 안이하고 나태한. 격정적인 삶을 원하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니나 부슈만으로 살고 싶은가, 그녀를 18년 동안이나 사랑해 온 슈타인 박사로 살고 싶은가.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나는 나로 살고 싶다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

 

아직은 여름의 입구에 서 있다. 이 장마가 지나가면 진정한 무더위가 찾아 올 것이다. 지옥과도 같은 삶의 한가운데에 있어도 절망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간 니나 부슈만처럼, 나도 이 여름의 한가운데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 너무 거창한 비유인가?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는 것일까  (0) 2008.06.28
유리 파편  (0) 2008.06.24
거리두기  (0) 2008.06.19
망설임  (0) 2008.06.14
타인의 블로그  (0) 2008.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