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유리 파편

시월의숲 2008. 6. 24. 18:08

그녀는 자신의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오 미리 정도 되는 굵은 유리조각이 오른발바닥 새끼발가락 아래에 박혀 있었다.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조심스레 박힌 유리파편을 끄집어 내었다. 약간의 통증이 그녀의 이를 꽉 깨물게 만들었다. 조금만 지혈을 하면 금방 멎을 피였지만 그녀는 흐르는 피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약간의 현기증이 이는 듯 느껴진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그녀는 그 유리 파편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생각했다. 그녀가 유리병을 깬 것은 한 달도 전의 일이었다.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간 유리병은 그 자리에서 박살이 났다. 그때 꼼꼼히 치운다고 치웠는데, 아직도 그 잔해가 남아있었다니. 그녀는 문득 엉뚱하게도 예전에 들었던 눈의 여왕이라는 동화를 떠올렸다. 눈의 여왕이 깨버린 거울 조각이 눈에 들어가 그녀의 시종이 되어버린 가련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 소년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마법이 뭐였더라? 진정한 눈물이었던가? 그녀는 그 이야기의 결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소년은 차디찬 눈의 나라에서 집으로 돌아왔는가? 그녀는 소년이 눈의 나라에서 계속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흐르던 피가 점차 옅어졌다. 그녀는 꿈 속인냥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붉은 피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기억과도 같았다. 부서진 유리처럼, 그녀의 기억도 부서진 채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가 어느 순간 발바닥에 박혀서 그 존재를 알린다. 분명히 깨끗히 쓸어냈다고 믿고 있지만 그건 위장일 뿐이다. 지워버리고 싶은, 지워버렸다고 굳게 믿고 있는 기억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혼자가 아니었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통증도 잊은 채 쿵쿵 소리를 내며 냉장고 문을 열기도 하고, 싱크대의 환풍기를 틀어보기도 하며, 괜히 수돗물을 틀어 손을 씻기도 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찬 방바닥엔 붉은 발자국이 꽃처럼 찍혔다. 바닥에 붉은 꽃들은 점차 늘어났다. 그녀는 그것이 재미있어 부엌을 이리저리 오갔다. 부엌 바닥은 금세 붉은 꽃밭으로 변했다. 그녀는 그 꽃밭 한가운데 벌러덩 누웠다. 천장의 검은 곰팡이는 저 멀리서 밀려드는 검은 구름으로 변하고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는 기차가 달려오는 소리로 변했다. 그녀는 그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그녀는 불쑥불쑥 튀어와 박히는 유리 파편에 대해서, 기억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유리 파편이 되리라. 눈의 여왕이 가진 거울 조각이 되리라. 누군가의 심장에, 눈동자에, 발바닥에 가 박히는, 그래서 피 흘리게 만드는 파편이 되리라. 아, 이 붉고도 뜨거운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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