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2005.

시월의숲 2008. 6. 22. 13:14

나는 언젠가 내가 인생의 무의미함에 대해 깊게 탄식했을 때 니나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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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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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에게 몹시 고독하다고 말했고 그 말에 대해 나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당신은 진부하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것이며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당신을 찾았을 때, 나는 얘기해야만 할 게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이것은 아주 무의미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쏟아버리고 나면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비참하고 두 배나 더 고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속을 보이면 보일수록 타인과 더욱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말없는 공감이 제일입니다.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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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런데 그것은 그들 탓이야. 그들은 운명을 원하지 않거든.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는 몇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으려고 해.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차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일탈이란 편한 점도 있으니까. 혹은 마치 파산 직전에 있는 상인이 그것을 숨기고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한 후 일생 동안 그 이자를 갚아가며 늘 불안하게 사는 것과도 같지. 나는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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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지 꽉 붙잡고 있으려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집시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삶은 잠정적이었다. 한군데에 천막을 치고 한동안 살면서 정성을 쏟다가 그곳에 대해 알 듯하면 망설임 없이 천막을 거두고 그곳을 떠난다. 그녀의 얼굴에는 야생적 자유에 대한 행복감과 고향 없는 사람의 슬픔이 함께 있었다. 깊이 잠든 얼굴에도 이것이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니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완전하게 사는 삶! 나는 이것을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계속 생각했다.(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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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결말이 아니고, 죽음도 겉보기만 그렇지 결말이 아니고. 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모든 것은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한 조각을 끌어내서는, 현실에는 없고 삶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스울 뿐인, 작고 깔끔한 설계에 따라 그것을 건축하고 있어. 모두가 꾸민 사진에 지나지 않아.(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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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따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엇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게 나는 싫어.(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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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별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 같아. 이별과 단순화. 언니가 내 말을 이해한다면 말이야. 나는 빈방과 역의 대합실들, 사람을 붙들어두지 않는 것을 좋아해.(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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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멋진 아침이었다. 이런 아침은 다른 때라면 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해뜨기 직전의 시간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쌀쌀하고 냉정하고 차가우며 엄격했다. 세상이 드러나기 바로 직전의 휴식 시간, 마치 자연이 호흡을 멈춘 듯한 시간, 어떠한 소리도 생명력이 없는 듯한 무시무시한 시간, 해뜨기 직전의 시간은 시간보다는 영원에 더 가까웠다.(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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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요. 내가 아는 건 단 한 가지, 구속받지 않고 싶다는 거죠. 나는 자유로워야 해요. 나에게는 나의 의지에 반해서 나를 내모는 어떤 것이 있어요.(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