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쩔 수 없는 일들

시월의숲 2008. 9. 2. 13:18

어제는 오랜 시간을 들여 미뤄둔 빨래를 했다. 주인집 할머니의 세탁기를 쓰려고 했지만(할머니께서 허락해 주셨다) 며칠째 서울 아들네에 가셔서 돌아오지 않으셨다. 물론 방문은 굳게 잠궈 두고서. 속옷이나 양말, 수건 같은 것들은,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한다면, 손수 빨아도 별 무리가 없지만, 부피가 큰 옷들은 손으로 빨기에는 힘이 드는 것이다. 며칠씩 집을 비우는 주인 할머니 덕에 나홀로 지내는 것은 좋은데, 빨래 때문에라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세탁기를 사기에는 돈이 많이 들고, 설사 산다고 해도 그 큰 덩치를 놓을 마땅한 장소도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손으로 빨 수 밖에.

 

시간을 들여 손빨래를 하고 나니 양말 한짝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을 보니, 헹굴 때 수챗구멍에 빠진 모양이었다. 처음 그 구멍을 보았을 때 내 주먹보다 큰 크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언가를 실수로 빠뜨릴 것을 대비해서 그 위에 망을 설치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사서 한 번 밖에 신지 않은 양말이라 잃고 난 뒤 속이 무척 쓰렸으나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불현듯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단히 마딱뜨려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그 어쩔 수 없음을 빨리 받아들이고 체념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얽매여 어쩔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가지거나 항상 투덜대고만 있다면 삶이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충분히 해결할 수 있거나 그럴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귀찮아서, 혹은 비겁하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핑계를 대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것. 그것이 나같이 가난한 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 마인드가 아닐까? 뭐, 슬기롭게, 란 말이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말 같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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