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허허로운 마음으로

시월의숲 2008. 11. 10. 18:34

어제 집에 갔다가 일만 실컷하고 오늘 울진으로 왔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생활했던 방(이제는 동생의 전용 방이 되어버린)의 묵은 책상을 드러내고 옷장을 들여놓고 책장을 다시 정리했다. 비교적 간단하게 보였는데, 막상 정리하려고보니 무슨 물건들이 그리 많이 나오던지!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이 사이사이 많이도 숨어 있었다. 동생은 무조건 버리려고만 하고 나는 되도록 쓸 수 있는 물건들을 버리지 않으려고 해서 동생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아니, 쓸 수 있는 물건들을 왜 버리냐고!

 

동생은 이런 나를 보고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기간이 지난 신문지 한 조각, 다 쓴 볼펜 한 자루를 버리는 것도 아까워하시는 분이다. 나도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동생은 지금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와 할아버지는 전혀 다른데, 동생 눈에는 버리기 전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이 답답해보였나보다.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집에다 쌓아놓고 버리지 않는 것들의 대부분은 내가 생각해도 그리 쓸모있는 것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대학교 다닐때 수업시간에 작성했던 리포트나 조별 리포트, 혹은 노트 같은 것들. 나는 그때 나름 열심히 작성했던 그 글들을 휴지조각 마냥 버리고 싶지는 않았던가 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 본 적이 있던가? 아, 나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물론 예는 그것 뿐만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던 것들은 대부분 그 시절 내가 무엇에 열중했던 것이거나, 나중에라도 추억하고 싶어했던 것들이다. 나중에 이걸 보면 풋내나는 글에 피식 웃으며 재밌어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래서 그것들로 인해 나는 그 시절을 추억했는가? 그래서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 들었는가?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아마 얼버무릴 것이다. 나는 그 잡동사니들을 나중에라도 추억하고자 쌓아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단순히 모아두고픈 마음 때문에 그리도 쌓아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원히 내 것은 없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추억도 희석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질없게.

 

그렇다. 부질없다는 마음이 들때 버려야 한다. 내가 모아두고서 돌보지 않았던 것들을 이제는 자유로이 풀어주어야 한다. 좀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버릴 때 버릴 줄 알아야 새 것도 품에 안을 수 있는 법. 조금은 허허로운 마음으로 일상을 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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