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듀나, 『태평양 횡단 특급』, 문학과지성사, 2002.

시월의숲 2009. 3. 8. 21:48

처음 듀나의 글을 어떤 식으로 접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도 인터넷으로 그(혹은 그녀)의 영화평론을 먼저 읽었는지도 모르고, 신문에 실린 칼럼을 먼저 읽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의 소설만은 제일 나중에 읽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는 맨 처음부터 그가 소설인가인줄은 알지 못했으니까.


어떤 형태의 글을 먼저 읽었건 간에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놀라움을 잊지 못한다. 전방위적인 박학다식함과 자유분방한 사유, 그리고 독특한 취향과 마니아적인 집요함까지. 나의 협소한 세계관과 짧은 지식에 비해 그가 쓴 글은 너무나 거대하여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광대무변의 우주(너무 거창한가?) 같았다. 그 후로 듀나의 영화낙서판을 즐겨찾기 해놓고 틈틈히 읽었으며, 그가 쓴 칼럼이나 소설들을 찾아서 읽었다.


그렇게 듀나의 글들을 읽고, 그의 스타일에 익숙해지고 나니 처음에 들었던 그 놀라움은 점차 줄어들었지만(심지어 지식의 무미건조한 나열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글은 내게 있어 미지의 상상력이며 새로운 세계였다. SF소설을 거의 읽지 않던 내가 SF소설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 흥미는 듀나처럼 마니아적이진 않지만 처음 SF소설류를 접할 때 느꼈던 거북함이 사라진 것만 해도 나에게 있어서는 큰 수확인 것이다.


듀나의 소설집 <태평양 횡단 특급>은 비교적 오래전에 나온 책이지만, 예전에 읽었던 <대리전>에 비해 더 다가가기 쉬웠고 개인적으로 더 재미있었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각각의 작은 아이디어들을 발전시킨 소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마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히 드러나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발전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듀나 소설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것은 SF적(?) 상상력과 논리가 재치 있게 결합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 시간여행, 인과율, 로봇, 클론, 조종, 우주, 살인, 전쟁, 괴물, 예언, 외계인... SF영화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러한 소재들을 듀나는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버무려서 여러 편의 흥미로운 단편들을 만들었다. 몇몇 단편들은 아이디어의 실험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내겐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소설이라면 흔히 등장하는 휴머니즘적인 터치가 없는 것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어설픈 휴머니즘이나 인간중심적인 사고는 듀나의 소설에서는 신물이 날 정도로 고루하거나 소설과 전혀 상관없는 말들일 뿐인 것이다. 우주를 논하는데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리고 기계들이라고 자신들의 문화를 스스로 창조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과연 인간들의 문화가 다른 어떤 것들보다 우월한 것인가? 등등.


그러나 그 어디에도 비관적이고 운명론적인 우울함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지루한 인간들의 머리 위에 존재할지도 모를 전복적인 세계를 건조하고 흥미롭게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듀나는 기계들만이 지배하는 세계에 더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제외한 것들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불필요한 오해와 감정적 소모, 모든 인간적인 잡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리고 무엇보다 지루하지 않은 세계.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일이 아닌가? 아, 그저 상상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