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더듬이가 첫마디를 소리내기 위해서 몹시 안달하는 동안은, 마치 내계의 농밀한 끈끈이로부터 몸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리는 새와도 흡사하다. 겨우 몸을 떼어 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물론 외계의 현실은 내가 버둥거리는 동안, 휴식을 취하며 기다려 줄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다려 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니다. 내가 애써서 간신히 외계에 도달하여 보아도, 언제나 그곳에는 순식간에 변색되어 어긋나 버린…… 더구나 그것만이 나에게 어울릴 듯이 여겨지는, 신선하지 못한 현실, 거지반 썩은 냄새를 풍기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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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숨을 죽이고 그 얼굴을 주시하였다. 역사는 거기에서 중단되었고, 미래를 향하여도 과거를 향하여도 무엇 하나 말을 건네지 않는 얼굴. 그러한 불가사의한 얼굴을 우리들은 방금 잘려 나간 나무의 그루터기 위에서 보는 때가 있다. 신선하고 풋풋한 색을 띠면서도, 성장은 거기에서 멈추고, 예기치 못한 바람과 햇빛을 받아, 원래 자신의 소속이 아닌 세계로 돌연히 드러난 그 단면에, 아름다운 나뭇결이 그려 낸 불가사의한 얼굴. 단지 거부하기 위하여 이쪽 세계로 향하여진 얼굴…….(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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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다만 보여지고 있었다. 나는 다만 보고 있었다. 본다고 하는 것, 평소에 아무런 의식도 없이 하고 있는 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이토록 살아 있는 자의 권리의 증명이며, 잔혹함의 표시일 수도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참신한 체험이었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일도 없고, 소리치며 뛰어다니지도 않는 소년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을 확인하는 방법을 배웠다.(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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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고통과 피와 단말마의 신음을 보는 게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마음을 섬세하고, 밝고, 부드럽게 만드는데도 말이야. 우리들이 잔인해지거나 살벌해지거나 하는 것은 결코 그러한 때가 아니야. 우리들이 갑자기 잔인해지는 건, 가령 이렇게 화창한 봄날 오후에, 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에,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니?(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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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의 어떠한 보잘것없는 단편이라도, 이별과 출발의 통일적인 감정을 향하여, 최대한으로 집결되어 있었다. 내 눈 아래에서 뒤로 물러나는 플랫폼은, 아주 의젓하고 예의바르게 멀어져 갔다. 나는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콘크리트의 무표정한 평면이, 그곳에서 움직여, 떠나고, 출발하는 것들에 의하여, 얼마나 눈부신 모습으로 변모하는가를.(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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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우리들을 과거 쪽으로만 잡아당기는 것은 아니다. 과거 기억의 여기저기에는,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강력한 강철로 된 용수철이 있어서, 그것에 현재의 우리들이 손을 대면, 용수철은 곧바로 늘어나 우리들을 미래 쪽으로 퉁겨 버리는 것이다.(267~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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