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휴머니스트, 2004.

시월의숲 2009. 11. 8. 10:00

예술의 영역에 나타난 한 명의 천재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마찬가지로 역사상의 별 같은 순간은 이후 수십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한다. 전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빨려들어가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시간의 뾰족한 꼭지점 하나에 집약되어 실현되는 것이다. 보통은 평온하게 전후로 나란히 일어나던 일이 단 한 순간 속에 응축되어 나타나고, 그러고 나면 그 순간은 역사상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결정하게 된다. 단 한 번의 긍정이나 단 한 번의 부정. 너무 빠르거나 혹은 너무 늦거나 하는 일이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개인의 삶, 민족의 삶, 심지어는 인류 전체의 운명의 흐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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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 아주 드물게만 내려오는 이런 위대한 순간은, 잘못 불려나와 그 운명의 순간을 장악하지 못한 인간에게는 모질게 복수하는 법이다. 조심성, 복종, 노력, 신중함과 같은 모든 시민적인 미덕들은 저 위대한 순간의 불길 속에 아무런 힘도 없이 녹아 내리고 만다. 위대한 운명의 순간은 언제나 천재를 원하고 그에게는 또 불멸의 모범이라는 명예를 안겨주지만, 유순한 자에게는 그렇지가 못하다. 오히려 경멸하며 밀쳐 버린다. 지상의 다른 신(神)이기도 한 위대한 운명의 순간은, 불 같은 팔로 대담한 자들만을 들어올려 영웅들의 하늘로 들여보내 주는 것이다.(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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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모순이지만 영웅적인 죽음으로부터 삶이 솟아 나오고, 몰락으로부터 무한한 상승 의자가 솟아 나오는 법이다. 명예를 향한 욕망은 성공이라는 우연성에만 집착하며 불타오른다. 그러나 한 인간의 몰락만큼, 이길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한 힘에 맞서 싸우도록 그렇듯 장엄하게 인간의 심정을 드높이는 것은 없다. 그러한 몰락이야말로 시인이 여러 번 그리고 삶이 수없이 형상화해낸 모든 비극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비극인 것이다.(3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