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똑똑똑

시월의숲 2010. 2. 23. 22:14

1.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어제 아침에는 창 밖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길래 비가 오나 싶어 창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그 소리는 비가 아니라 눈이 녹아서 떨어지는 소리였던 것이다. 집집마다 달아놓은 물받이로 결코 녹을 것 같지 않던 눈이 흘러내리며 소리를 낸다. 똑, 똑, 똑. 바위처럼 단단하게 얼어서 곡괭이로 깨야만 깨어질 것 같던 눈덩이들이 고작 하루만에 스스로 녹아 땅으로 스며들다니. 고만고만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다. 기분좋은 소란스러움. 집들이, 나무가, 들판이 서서히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눈은 그렇게 모든 집들의 지붕 위에 내려 고유의 음악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 집 처마에서의 똑똑똑과 저 집 처마에서의 똑똑똑이 겹쳐져 똑똑똑똑똑똑, 그렇게. 갑자기 나도 모르게 기재개가 켜진다. 뚝뚝뚝, 그렇게.

 

 

2.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샀다. 인터넷으로 다른 책들과 같이 구입했는데, 유독 이 책의 제목이 내 눈길을 끈다. 왜? 문득 내가 가진 침묵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 침묵은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침묵이요, 말하고 나서 후회하고마는 침묵이다. 한마디로 성숙하지 못한 침묵. 그것은 진정한 침묵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침묵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도 몇 마디의 말을 내뱉고 이내 후회하고야 말았다. 무엇 때문에 나는 침묵을 두려워하는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법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까? 진정한 침묵에 대해서, 침묵하는 법에 대해서. 이 책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상관없다. 이 책을 가짐으로써 나는 이미 침묵이 가진 신비한 힘의 일부를 가진 것처럼 생각된다. 이런걸 직감이라고 하던가? 혹은 누군가 내 가슴에 똑똑똑 노크를 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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