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중혁, 『악기들의 도서관』, 문학동네, 2008.

시월의숲 2011. 11. 8. 23:37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악기들의 도서관>에서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 계시처럼 머릿속에 위와 같은 문장을 떠올린다. 그렇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이, 눈덩이가 불어나듯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점점 커졌다. 그것은 누군가 나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이었을까? 소설 속 '나'의 대답처럼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지 않으려면, 그러니까 억울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김중혁은 책에 담긴 여덟 편의 소설로 대답을 대신한다. 

 

몇 편을 제외한 대부분의 소설 속에는 많든 적든 소리들이, 적어도 소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소리(혹은 음악), 이것이 바로 이번 소설집의 키워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또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때로는 완벽한 문장을 말하는 것보다 어떤 이름이나 어떤 단어나 어떤 고유명사를 얘기할 때 이야기가 더 잘 통하는 법'이라고 <나와 B>에서 '나'가 한 말처럼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 나와 음악적 취향이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어떤 부분을 같이 좋아하고 깊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즉 김중혁이 내놓은 대답은 취향이 같은 동지를 만나 취향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좋아해마지 않는 어떤 뮤지션의 음악을 이해하고 공감할만한 사람이 한 사람은 있다는 것이니까, 최소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더 나아간다면 <엇박자 D>에서처럼 나와 전혀 다른 취향의 사람이라고 해도 마지막에는 함께 합창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마니아적인 열정과 소수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가득한 소설집이다. <유리방패>를 읽을 때는 몇 번이나 웃음이 터져나왔다. 계속해서 면접에서 떨어지는 청년백수들의 애환을 정말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급기야 그들을 전문면접관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실패자의 삶, 아무것도 아닌 자의 삶, 누추한 삶, 자동화된 삶에서 일단계 도약하는 순간을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비애에 찬 모습으로 그려보인다. 인생 역전까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집을 무척이나 따뜻하게 만든다. 그도 알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기를 우산없이 맞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쓸쓸하지만 소나기는 언젠가 그칠 것이고, 소나기를 맞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음을. 아, 이런 비유는 식상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고 지나간다는 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쨌건 그의 소설은 쓸쓸하지 않다. 그보다는 재미난 장난감 같달까? 작가 자신은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적어도 나에게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