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소설가 배수아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가 써놓은 책 뒷면의 글 때문에. '나는 제발트를 읽었다. 그 이후에도 하루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변한 것은 단 한 가지, 제발트 이전과 제발트 이후가 있을 뿐.' 이라는 문장. 제발트 이전과 제발트 이후란 과연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읽고보니 과연 배수아라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가 쓴 일련의 소설들, '에세이스트의 책상', '당나귀들', '독학자', '서울의 낮은 언덕들' 등에서 보이는 어떤 분위기나 스타일 혹은 정신 같은 것이 제발트의 그것과 얼마간 닮아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어쨌든 제발트가 쓰는 소설의 방식, 어떤 줄거리가 있고 그것에 대한 묘사가 있으며,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단계를 가지는 소설이 아니라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호하고, 그러한 구별조차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이 무엇이라 불리든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어쨌든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이 된 그런 소설은 배수아가 아닌 이미 제발트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배수아가 제발트를 읽고 느꼈던 '현기증처럼 엄습했다 사라진, 은밀하고 남모르는 개인적인 위안'이 앞서 언급했던 그의 최근 소설들에 음악처럼, 바람처럼, 공기처럼 스며들었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혹은 자신이 고민하고 있던, 지금 쓰고 있거나 앞으로 써야할 글의 형태나 내용이 제발트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든 일종의 확신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위안'이란 아마도 그로부터 나온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었으리라.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라는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분위기에 젖어들기 위해서는 배수아 소설에 흥미를 느끼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어쩌면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배수아의 소설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서 읽는 독자라면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 또한 흥미를 가지고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뭐 이런 소설이 다 있지? 이런 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나?' 라는 이런저런 불만과 의문스러움에 책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물론 배수아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제발트의 소설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사실 그리 쉽게, 빨리, 빠져들도록 읽었던 것은 아니다. 배수아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도 천천히 생각하면 읽어야 했는데, 읽다가도 순간 잡생각이 들라치면 다시 앞장으로 넘어가야만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소설은 어떤 리뷰어의 말처럼 분위기를 타는(?) 소설이라서, 심리상태가 혼란스럽거나 주위가 시끄럽다면 쉽사리 집중해서 읽기가 힘든 소설인 것이다. 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작용 같은 소설의 형식과 백과사전적인 정보, 역사적 사건 등에 대한 성찰에 적응을 한다면 특유의 허무적인 분위기 속에서 차분히 드러나는 문명비판적 사고를 제법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다 읽고나면 이런 잡다하다싶은 고고학적 여행기가 결국 '토성의 고리'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왜 제목이 '토성의 고리'여야만 했는지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작가가 제법 방대한 작업을 끝내고 난 뒤의 공허감을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퍽 카운티로 도보여행을 떠난 것으로 시작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여행을 하면서 더욱 큰 공허감에 사로잡혀 결국 여행이 끝나자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이 소설은 그렇게 입원하고 난 후 여행에서 느꼈던 것들을 다시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고로 일종의 여행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자신이 발로 걸어다니며 둘러 본 지역의 풍경과 역사, 사람 등을 작가 특유의 방대한 지식과 식견으로 풀어낸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이기에 그가 풀어놓는 역사적인 상황들은 교묘하게 허구와 섞여있다. 그가 발을 디딘 모든 장소들은 한 때 부귀와 영화를 자랑했던 곳이며, 문명의 찬란함이 빛을 발했던 역사적인 장소였으나 지금은 쓰러진 나무, 폐허가 된 마을, 돌무더기만 남아 있는 모래사장, 그 어디에도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곳으로 변해버렸다. 그 삭막함과 죽음같은 공허는, 과거 그곳에서 이루어졌던 찬란한 문명의 발전이란 것이 실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 위에 이루어졌던 것임을 깨닫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가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선택했던 여행의 장소가 애초부터 그 목적과 어긋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무참함. 작가가 비탄에 잠긴 어조로 과거의 영광을 무색하게 만드는 시간이라는 무지막지한 파괴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공허감은 더욱 커지고 깊어진다. 인간이란 결국 그러한 파괴자의 손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영광의 장소에 남겨진 돌무더기, 폐허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며 종국에는 모래로 변해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여행이 끝나고 난 뒤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병원으로 달려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혼자서 그 거대한 공허와 맞서기에는 그 역시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렇지 않고서야 공허를 떨쳐내기 위해 황량하기 이를데없는 동부지방으로의 여행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토성의 고리>는 낯설고 은은하게 발하는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소설이다. 어조는 슬픔을 품고 있으며, 하나의 사물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사유를 물흐르듯 서술하는 형식 또한 독창적이다. 제목 또한 소설 전체를 아우르며 어떤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결국 다시 배수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어느 날 한 명의 '제발디언(Sebaldian)'으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받았다고 했다. 나에게 그 제발디언은 배수아였으며, 나 또한 이 책을 다 읽은 날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눈이 왔으며, 베란다 창문으로 보이는 지붕들이 온통 하얗게 변했고, 도로는 질척이며 차들은 거북이 운행을 하였다. 그 이후에도 하루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고백했듯, 변한 것은 제발트 이전과 제발트 이후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기에는 내가 이 소설을 너무나도 천천히 읽었고(소설의 무언가를 따라잡는데 애를 먹었고), 결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위안'을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배수아와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므로. 하지만 한 명의 제발디언을 알았다는 사실에 나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이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소설은 그렇게 나를 다른 소설로 건너가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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