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나서, 내 마음 속 한 켠에는 항상 로맹 가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것 같다. 약간 낯간지러운 말이긴 하지만 정말 그랬다. 하지만 그 이후에 로맹 가리를 다시 읽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도서관에 가서도 항상 로맹 가리가 쓴 <하늘의 뿌리>, <새벽의 약속>, <자기 앞의 생> 같은 책들을 눈으로 쓸어보고 손으로 만져보기만 했을 뿐, 빌린다거나 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 망설임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세상엔 그런 것들로 가득하니 굳이 머리 아프게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한 권으로 알게 된 로맹 가리의 다음 책으로 <자기 앞의 생>을 선택한 것은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로맹 가리에 좀 더 다가간 느낌이 든다.
러시아 태생의 유태인으로서 프랑스어로 글을 쓴 로맹 가리의 정체성과 에밀 아자르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필명으로 글을 써 낸(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개인적인 그의 사생활과 충격적인 죽음. 단편적이나마 그의 삶의 굴곡과 편린들을 알게 된 것이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를 더욱 가슴 깊이 느끼게 된 원인이 되었고, 나아가 로맹 가리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는데, 로맹 가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작가의 삶과 소설이 성공적으로 밀착되어있는 예로 로맹 가리만한 사람이 없다고.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소설이었고, 그가 쓴 소설이 곧 그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자기 앞의 생>은 슬픔이 전면에 넘치고 있지만, 결코 슬프다 말하지 않는 소설이다. 아프지만 아프다 말하지 않고, 절망적이지만 죽는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 따위 것들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삶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에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엉덩이로 벌어먹고' 산다고, 창녀의 자식이라고 질질 짜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주인공인 모모는 생각한다. 삶의 부조리를 몸소 체득한 사람들에게 엄살은 통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모모는 창녀의 자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군지 모르는 채, 로자 아줌마에게 얹혀 살고 있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와 같은 아이들을 여럿 데리고 살고 있는 사람으로 모모의 말을 빌리자면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에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유태인이며,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아파트에는 로자 아줌마 뿐만 아니라 여장 남자, 아랍인, 흑인 등등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티격태격하지만 로자 아줌마가 뇌혈증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 도망가지 않고 그녀를 돌보는 것은 결국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사랑이다. 모모에게 로자 아줌마는 어머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 로자 아줌마를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도 모모 자신이다. 그것은 모모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죽음마저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자 하는 신념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모모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양탄자를 파는 하밀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 뿐'이라고. 모모는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헤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내 존재의 유일한 증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의 나를 돌봐주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로자 아줌마라는 사실을. 그리고 저마다 주어진 자기 앞의 生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사실을.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로자 아줌마의 죽음 이후의 모모의 삶이 궁금했지만, 그의 고백은 거기서 끝난다. '사랑해야 한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겨둔 채. 슬프지만 슬픔을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머금게 하는 힘이 이 소설에는 있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실린 조경란의 글처럼,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소외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나서 쓴 감상문에서 나는 로맹 가리가 인간에 대한 '희망'보다는 '절망'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자기 앞의 생>은 그와는 반대로 '절망'보다는 '희망'에 더 가까이 있었다.
가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외국의 작가가 누구인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누굴 가장 좋아하는지 몰라서 늘 망설이곤 했다. 좋아하는 작가가 반드시 몇 명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나니 로맹 가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낯간지러운 이야기로 시작해서 낯간지러운 이야기로 끝나는 것 같지만, 아직까지 로맹 가리의 읽지 않은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진다. 얼마전에 읽은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에 나오는 콩스탕스의 기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어떤 작품을 읽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자기 앞의 생>이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자연스럽게 선택이 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2013년에는 모모의 말처럼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사랑'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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